착한 척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착하게 태어난곤데
나도 진짜 곤란하다
나는 예쁜 척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예쁘게 태어난곤데......
그거를
남들이 막 막 예쁜 척하는 거라고 그니까는
애라는 힘들어
잘 지내던 직장 동료에게 착한 척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다. 커다란 프로젝트 하나가 끝이 나고 업무에 여유가 생겨 요가사업을 해볼까 검색도 하고 요가 자체도 열심히 하고 요가복도 요가매트도 새로 사고 아무튼 좀 한갓진 여름을 보내던 중이다. 각종 인긴관계 갈등으로 얼룩진 봄이 지나고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지나 했다.
그럴 리 없지.
세상 누구도 그런 삶을 살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는 착한 척 하는 누군가를 내가 꼴보기 싫어 손절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바로 그 착한 척 하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착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착하게 태어난 사람.
그냥 착한 사람.
기억을 더듬어보니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어느 날 처음으로 그런 소리를 들었던 거 같다. 친하게 지내던 두 친구가 놀이터에서 싸움이 났다. 갈등이 싫던 나는 옆에서 구경만 하는 아이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걔네를 말렸다. 싸우지 말라고, 기분 풀고 놀자고.
- 짜증나게 착한 척 하지 말고 꺼져라.
그 때 저 소리를 들었다. 착한 척.
내가 착한 척을 했던 걸까? 그냥 내가 좋아하는 친구 둘이 싸우는 갈등상황에 마음이 힘들었던 건데...... 착한 척이 아니라 착했을 뿐.
나는 이후로도 착한 척 하지 말라는 소리를 꽤 들으며 살았다. 나의 착한 척이 누군가에게 민폐가 된 경우도 물론 있었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A가 B의 학용품을 훔치고 나는 그 장면을 목격한다. 장난으로 그랬다고 치자. A와 B는 친한 사이고 나중에 내가 그랬지! 하며 웃으며 놀래켜주려고 했다 치자. 하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다. 누가 가져갔냐며 속상해하는 B에게 다가가 "A가 그랬어..." 말해준다.
A에게도 말한다.
- 내가 다 봤어. 돌려줘.
하지만 그 순간부터 나는 착한 척하고 눈치 없는 멍청한 사람이 되는 거다. A도 나를 욕하고 A와 친한 사이였던 B도 결국엔 내 욕을 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모두에게 만만한 사람이 되었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대학 시절에도, 회사에서도.
알면서도 참지 못하겠다. 천성이 착하게 타고 났다. 드라마 속 애라가 했던 대사가 구구절절 공감되었다. 나는 착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착하게 태어난 건데. 그걸 자꾸 착한 척하는 거라고 하면 너무 속상하다. 착한 게 죄는 아니잖아? 누군가의 착한 천성이 민폐가 되는 상황이라면 그로 인해 손해보는 사람들의 의도 자체가 애시당초 불순했다고 본다.
며칠 전 직장에서 있던 일도 비슷했다. 잘 지내던 직장 동료는 늘 나를 토닥이고 걱정했다. 너무 주눅 들지마, 윤성씨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러던 중 상사로부터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을 일이 생겼고 해당 일의 책임자는 그 동료였고 나는 관계가 없었기에 있는 그대로 말했다.
당연히 화살은 그에게로 돌아갔고.
그러자 저 소리가 나온 거다.
- 윤성씨 평소에 그렇게 착한 척 하더니...... 그렇게 뒤통수 칠 거면 착한 척을 하지 마.
정말 화가 났다. 착한 것과 멍청한 건 다르다. 저 인간은 평소 내가 유순하게 말하고 행동하니 나를 멍청하고 본인 아래로 봤던 모양이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아무 말 못할 거라 생각했던 게 틀림 없다.
나는 착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은데 말이지.
쏘아대는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듣고만 있다가 사과했다. 나로 인해 곤란해졌으면 미안하다고...... 그런 다음 그를 나의 마음에서 삭제했다.
계속 얼굴을 보고 지내야 하기에 언성 높이고 싸우고 싶지는 않았고 상사에게 알려야 할 내용을 알렸으니 그만이다. 그가 나를 착한 척하다가 뒤통수 치는 사람으로 보든 말든 상관없다.
기분은 나쁘지만 나 착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착한 거야, 라고 그를 설득할 시간도 에너지도 아깝다는 생각이었다.
누굴 만나도 처음에 나는 예의를 갖춘다. 그리고 나의 착한 천성을 숨기지 않는다. 생긴 것도 워낙 순하게 생긴 터라 사람들은 나를 착하고 순한 사람으로 본다.
그러고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이런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막 대하거나 이용하려는 부류와 내가 베푸는 만큼 예의를 갖춰 나를 대하는 부류.
처음에는 모두 두 번째 부류인 척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밝혀진다. 특히 내가 마땅히 할 수 있지만 참다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그렇다.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던 사람은 내가 할말 하는 걸 괘씸해한다.
- 감히 네가? 평소에 그렇게 착한 척을 하더니?
아니, ㅅㅂㄴㅇㅈㄴㅃㅊㄱㅆㅂㄹㄴ!#@$!@#^%$^%@%$#
착한 척 아니라 착한 거고, 착하다고 멍청하고 만만한 사람인 건 아닌데 도대체 저 인간은 인성이 왜 저 모양 저 꼴인건지? 그럼 나는 착하다고 가스라이팅 당해왔으니 해야 할 말도 못하고 입 꾹 다물고만 있어야 하나? 나이가 들어서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 될 순간이 있다는 건 알겠다. 아까 말했던 A와 B친구 사이의 도둑질에 탐정마냥 나서 진실을 밝힌 일이나 누군가의 좋지 않은 싸움에 끼어들어 말리거나 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단순히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거 아닌지.
내가 해야 할 말을 함으로써 내가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다른 누군가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고 하여 박애주의 정신으로 참아야 하는 건지.
내가 억울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해야 할 말을 한 걸로 착하게 봤는데 아니구나? 이 소리는 멍청하게 봤는데 아니구나? 이 소리랑 뭐가 다른지.
정말 열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착하게 살 거다. 착한 척한다고 욕을 먹든 말든 상관없다. 누가 나의 착한 천성으로 인하여 '부당하게' 피해보는 일만 생기지 않도록 눈치보며 착하게 살 것이다. 나의 착한 천성으로 누군가가 '마땅한' 피해를 보는 건 두려워하지 않겠다.
착한 척하지 말라던 직장동료에게 사과한 것도 억울하지 않다. 착한 척해서 미안해 가 아니라 어쨌든 나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사과한 거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사과조차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뻔뻔해지는 연습을 할 생각이다. 매일 계속 얼굴을 보고 지내야 하는 사이지만 싸늘할 수 있는 뻔뻔함, 천성이 착한 사람들은 후천적으로 좀 뻔뻔해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천박하고 인성이 별로인 사람들을 접하며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꽤 인성이 괜찮은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 마음의 평안과 좋은 인상을 만들고 싶어서다. 그리고 정말 좋은 사람들만 내 곁에 남기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마흔이 되고도 관계는 참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