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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Aug 29. 2024

여름이 간다

덥다고 미워할 틈도 없이 여름이 간다.

여름이 원래 이렇게 짧았던가?

서른 아홉 번의 여름들은 덥고 습하다고 늘 짜증만 냈었는데......

올해 유독 인간관계에 시달리다가 지칠대로 지쳐 바라본 여름 풍경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뜨거운 공기, 끈적한 습기.

땀을 흘리고 마시던 시원한 얼음물.

아삭한 복숭아, 수박.

그리고 하타요가.


그토록 싱그럽고 뜨거웠던 나의 마흔번째 여름이

이렇게 또 지나간다.

하루 아침에 공기에서 열기가 빠졌다.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건 없다.

요가도 몇 년째 그저 그런 수준이고, 업무도 인간관계도 가족들과의 갈등도 명쾌하게 해결된 건 하나도 없다. 여행 한 번 제대로 다녀오지 못했고 당일치기로 바다라도 보자 했지만 그조차 못하고 여름이 간다.


브런치 연재 요일도 지키지 못했고,

당연히 제대로 된 글 한 편을 남기지 못했고,

그저 떠오르는 대로 끄적이는 이런 일기 같은 글,

뭐 일기라기엔 조금 괜찮다 싶은 정도의 글들만 주야장천 썼다. 힘든 현실에 다친 마음을 조금이나마 스스로 다독거리려고 쓴 글들이다. 사실 누구에게 보여주기도 부끄러운, 마음 속의 이야기들.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고요히 앉아 써 내려갈 시간이 없었다. 글은커녕, 마음에 담아두었던 책 두어권 조차 다 읽지 못했으니 말 다했다.


그래도 미련은 없다.

미련 없이 이번 여름도 보낸다.

하루도 게을렀던 적이 없는 여름이다. 늘 그렇듯 나의 하루하루는 치열했다. 일이 바쁜 와중에도 조퇴를 몇 번이나 하며 아이들의 공개수업에 쫓아다녔고,

몇 년째 이어오던 인간관계가 줄줄이 끝이 났지만 의연하려 애썼다. 오늘 아침, 4월에 손절한 아는 동생의 생일이라는 알림이 캘린더에 떴을 때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그걸 삭제하는 내 모습에 잘 극복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생일을 매년 반복해뒀을 때는 평생 갈 인연이라 믿었는데 정말이지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다.

퇴근하면 집에 와서 찌개를 끓이고 아이들을 씻기고 숙제도 시키고 그러면서 너무 피곤해도 짜증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이 내게 들려주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최대한 따뜻하게 대답했다. 물론 가끔 폭발해서 애들에게도 남편에게도 분노했지만 가출하지도 이혼하지도 않았으니 되었다. 여행은 못했지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들을 수시로 검색해 주문했고 함께 공연도 보러 다녔고 주말마다 이런 저런 체험들도 데리고 다녔다. 가족들과 함께 보고 싶었던 영화도 봤고 함께 먹어야지 기록해뒀던 음식들도 모조리 먹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며 계속 글을 썼다.

놓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읽는 글은 아니지만 꾸준히 썼고, 썼다가 다음 날 수치스러워 삭제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브런치북에 쌓인 60개의 글들이 뿌듯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뜬 구름처럼 지나가는 생각들을 이번 여름에는 이렇게 기록해서 남겼다는 게 내겐 큰 의미다.

나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지만

셀 수 없는 사람들 중에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이지만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서 이렇게 평범한 생각을 하며 시간이 흘렀다고,

글로 쓸 수 있으니 행복하다.

친구도 많지 않고 가족들에게 글을 쓴다고 밝히지도 못했지만 글마다 스무개 남짓의 라이킷이 있어 늙어서도 고독하지 않을 것 같다. 그걸로 족하다.


행복한 상상을 하며 여름의 끝자락을 보낸다.

투자한 금액이 한 300% 정도 상승세를 타는 것,

이번 주 로또에 당첨되는 것,

브런치 프로젝트에 당선되어 억대 작가가 되는 것.


흠,

너무 희박하니 조금 가능성이 있는 행복을 꿈꿔본다.


가까운 모든 이들의 건강과 마음의 안정,

계속 일을 하며 가족들을 챙기며 그 안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심적 여유.

그리고 스스로 만족하지만 밉지 않은 사람이 되는 꿈을 꾼다.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행복하다고 떠들어도

그게 보기 싫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어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 정도를 소망한다.

딱 그 정도는, 욕심이 아닌 소망이라 믿는다.


여름이 간다.

수억명의 사람들 중,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한 사람이

마흔 번째 여름을 보낸다.

그리고 맞이한다,

사계절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가을을.


가을 내음에 흠뻑 취해 또 하루하루 치열하게,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밤이다.

화려한 보석이 없어도

비싼 여행을 떠나지 못해도 괜찮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맞이하는 선선한 가을 공기,

그걸 들이킬 수 있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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