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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를 느끼기엔 공기만으로도 충분하다

쎄함을 느끼는 능력

by 사적인 유디

아빠의 딸로서 함께한 지 12년이 넘어설 때쯤에는 아빠의 숨소리, 눈빛, 발걸음, 공기만으로도 아빠가 몰래 술을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몰래 한 병을 마셔 놓고도 아빠는 안 마신 척을 하지만, 아이의 모든 감각은 아빠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단번에 느낀다.


멀쩡한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지고, 괜히 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나는 소름이 돋은 거 마냥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솟아난다. 누가 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을 하지만, 그 모습이 더 의심스럽다는 것을 아빠는 모르나 보다.


이럴 때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기 때문에 꼬치꼬치 캐묻지도 못하고 그냥 내버려둔다. 거짓말을 잘 못하는 타입의 아빠는 오히려 본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티를 내기도 하는데, 한 날에는 아빠가 몰래 아빠 방 베란다에서 술을 숨겨 놓고 마셨다.


밥을 먹던 아빠는 “아, 잠시 베란다에 좀 나가볼까~” 하면서 식탁에서 일어났고 베란다로 향했다.

또 조금 있다가 아빠는 “아, 잠시 폰 좀 확인해 볼까~”하면서 또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몇 분 안 되어서는 “잠시 화장실 좀 가볼까~” 하며 자리를 일어나기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이런 말을 내뱉지도 않을뿐더러, 이렇게 자주 밥 먹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아빠의 모습은 꼭 도둑이 제발 저린 모양새다.

(이 모습은 마치 거짓말하고 있음을 들키기 싫어서 더 열심히 거짓말했음을 티 내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같기도 하다.)


몰래 술을 마셨을 경우에는 묘하게 달라진 아빠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숨소리는 가쁘게 들렸고, 눈빛은 흔들렸으며, 발걸음은 제 발 저린 거 마냥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수상했다.

무엇보다 그 공기조차도 “아빠 술 마셨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빠는 괜히 평소에는 하지도 않을 질문을 하고, 말을 걸어오기도 했었다. 나는 아빠가 술을 마셨음을 눈치챘지만, 일부러 아는 척하면 괜히 더 스트레스만 받을 것 같아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는 아빠가 몰래 눈치 보며 술 마시는 모습이 짠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술은 금기항목이다.


조용히 술만 많이 마셨더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술로 인해 폭행과 폭언 등의 폭력이 오갔기 때문에 술이 허용될 수 없다.


어느 날에는 아빠가 계속 몰래 술을 마시길래 아빠 술 마시는 거 다 티 낸다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어떠한 티를 내지 않고, 정말 더 조용히 몰래 술을 마셨는데 문제는 베란다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커튼 뒤 그림자로 다 비쳤다는 것이다.

(정말 이렇게까지 술을 마셔야 하나 싶지만, 일단 이 모습도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한 날은 제삿날이었다. 누구의 제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제사가 끝난 후 아빠가 조용하길래 뭐 하나 봤더니 화장실에서 정종이 들어있던 주전자에 물을 받고 있는 것이다. 뭐 하냐 물으니 아빠는 당황하며 아무 말도 못 했는데, 알고 보니 몰래 정종을 다 마셔 놓고는 안 마신 척 정종 주전자에 수돗물을 담고 있는 거였다. (어린아이들도 갑자기 너무 조용하면 어디선가 몰래 사고를 치고 있다 하지 않나. 딱 그 모습이었다. 다만, 우리 아빠는 나이가 60이었을 뿐 …)


어이가 없었던 나는 그만 연기하고 그 물을 다시 다 버리라 했고 아빠는 조용히 물을 버린 채 나왔다.


이후로는 아빠가 몰래 술을 마셔도 더 이상 터치하지 않게 되었다. 아빠가 몰래 술 마신다는 것을 신경 쓰게 되는 순간 스트레스받는 건 오직 나였기 때문이다.


몰래 술 마셨다고 한 소리 하는 순간 우리는 싸움이 되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마시고 자게 내버려두었다. 포기를 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순간이었다.


최근 2년 사이에 아빠의 술에 터치를 안 하게 되자 나의 스트레스도 이전보다 덜했고, 아빠 역시도 계속 화내는 사람이 없어지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을 거다.


더 이상의 애정이 남아있지 않아 포기한 것인데, 상대방은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줘서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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