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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아빠는 공포였다

사촌을 피해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

by 사적인 유디


중학교 2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4녀 1남의 자식들 중 유일한 남자였던 외삼촌은 부산이 아닌 대전에 살고 있었으며, 결혼을 하지 않아 항상 막내 이모네에서 제사를 진행해 왔다. 외할아버지 제사 때가 되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자식들은 막내 이모집에 모여 공평하게 일을 나눠 제사 준비를 했고, 손주들도 모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아빠는 (나의)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제사 때에도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외할아버지 제사 때에도 어김없이 취해 있었다.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나는 아빠에게 절대 이모집으로 오지 말고, 집에 머무르라며 신신당부했고, 우리는 이모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사촌 동생과 사촌 언니와 좋은 시간을 보내며 제사 준비를 했다.


외삼촌, 이모들 그리고 손주들까지 모두 모여있는데,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그 순간, 오빠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숨이 탁-하고 멎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인터폰을 확인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빠가 떡하니 있었다.


공동 현관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를 탄 뒤, 이모집으로 들어오는 아빠를 기다리면서 나는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얼음장 같은 공포가 온몸을 감쌌다.


그렇게 아빠는 비틀대며 집 안으로 들어왔고, 아빠를 보자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왜 여기 왔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창피한 마음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빠는 꼬부라지는 혀로 각자에게 인사를 했고, 결국 제사까지 지내었다. 절을 하면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자꾸 넘어졌고, 제사가 끝난 후 밥을 먹을 때는 여기가 어디인지 인식도 잘 못하는지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른 채 창피함에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빠르게 밥을 삼켜댔고, 아빠의 주정이 더 심해지기 전에 집으로 빨리 가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부끄러움과 속상함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러댔고, 아빠한테 왜 찾아왔냐며 화냈다.


이 일이 있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끄러움에 이모 집을 방문하지 못하고, 제사 때가 되면 엄마만 찾아가고 있다.


아빠는 제대로 기억도 못하고, 잘 다녀왔다고 생각하는 게 웃기지만, 이날의 기억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렇게 그날 이후로 숨어 지내다 사촌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심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을 받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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