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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Oct 03. 2023

[오스트리아 멜크]자세히 안 보아도 예쁘다

흐리게 보여도 예쁘다

핸여지 핸여지!


여름은 숙소를 옮기거나 기차를 탈 때마다 ‘핸여지’를 외쳤다. ‘핸여지’는 핸드폰, 여권, 지갑을 잘 챙기자는 뜻의 줄임말이다. 이 구호 덕분에 우리는 여행을 끝낼 때까지 아무도 '핸여지'를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빈에서 멜크로 가던 날 내가 사고를 쳤다.


빈에서 멜크에 가려면 기차를 한 번 갈아타야 했는데, 처음에 탄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다음 기차로 갈아탈 시간이 오 분밖에 없었다. 플랫폼이 네 개 밖에 없는 작은 역이었지만, 첫 환승이라 셋 다 바짝 긴장했다(오스트리아에서 기차를 여러 번 타면서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기차를 놓치면 어떻게 하냐고? 표를 바꾸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볼 필요없이 그냥 다음 기차 타면 된다!). 있는 힘껏 뛰어 무사히 기차를 바꿔 타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창밖 풍경도 눈에 들어왔고, 한국에 있는 가을과 카*을 할 여유도 생겼다. 그러다가 나는 기차에 안경을 두고 내렸다.


빈에서 멜크로 가던 기차 안에서


변명을 하자면, 가까운 곳을 볼 때는 안경을 벗는 편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근시로 고생하던 사람은 노안이 올 때 살짝 행복해진다. 눈이 좋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바늘에 실을 꿰려면, 바늘을 쥔 손을 눈앞에서 멀리 내밀어야 바늘구멍이 보인다. 그러나 나처럼 근시였던 사람은 가까운 곳이 점점 잘 보이기 시작해서 급기야 안경을 벗으면 책도 읽을 수 있고 핸드폰 화면도 선명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다초점렌즈를 끼운 안경은 외출해서 버스 번호를 또렷하게 봐야 할 때나 필요하고, 집에서는 안경을 쓰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기차 안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나는 안경을 벗어서 기차 창틀에 올려놓았던 것 같다.


안경이 없다는 것도 한참 뒤에 알았다. 무서운 소냐 할머니를 만나고, 장을 봐서 저녁을 해 먹고, 식탁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안경이 안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아 엄마 안경 어디 있는지 봤나?
봄아 너는 못 봤나?
엄마 쭉 안경 안 쓰고 있었는데요?
맞아요. 멜크역에서 숙소에 올 때도 안경 안 쓰고 있었어요.
뭐라고?


봄은 핸드폰 사진 폴더를 뒤져서 멜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빈 서역에서 안경을 쥐고 앉아 있는 내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게 내 안경의 마지막 모습이다.


여름은 내 성화를 못 이겨 ÖBB(외베베-오스트리아 국영 철도) 고객센터에 안경을 잃어버렸다고 분실 신고를 했다. 자동응답 메일이기는 했지만, ÖBB는 분실물 접수를 잘 받았고 열심히 찾아보겠다고 답장을 했다. 열흘 뒤에는 한 번 더 메일이 왔다. 자기들 경험상 10일이 지나도 못 찾는 분실물은 영원히 못 찾더라고. 그래도 열심히 찾아는 보겠다고 말했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쯤 되면 너도 포기하라겠지.


영등포역이랑 비슷했던 빈 서역


그래서 나는 안경 찾기를 포기했다. 가까운 곳은 잘 보이지만, 먼 곳은 흐릿하게 보이는 흐린 눈을 하고서 남은 두 주를 다녔다. 오스트리아가 유난히 아름다웠던 이유, 다 ÖBB 기차에 안경을 두고 내린 덕분이다.


사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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