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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Oct 10. 2023

[오스트리아 멜크/그라츠]사진 찍어도 될까요?

그럼요, 그럼요!!!


멜크역

멜크 마지막 날, 짐을 싸서 일찌감치 역으로 갔다. 도착한 날 미처 살피지 못한, 멜크에서 꼭 봐야 할 곳을 표시한 안내판이 역 앞에 있었다. 기차 시간은 한 시간도 넘게 남아 있어서 아이들은 뒤늦게 카메라를 메고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겠다고 했다.

멜크역 앞 안내판

아이들이 돌아오자 나도 다 못 둘러 본 멜크가 궁금해졌다. 해 질 녘과는 다른 느낌이 있는 동네를 걷다 보니, 아름다운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과 정원을 예쁘게 꾸며놓지 않으면 벌금이라도 내는지, 집집마다 색은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의 색으로 외벽을 칠했고 정원은 말끔했다. 흙에다 무슨 거름을 주는 건지 이 나라에는 나무도 꽃도 키가 한국의 두 세배는 되는 것 같았다.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이 꾸민 정원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멜크는 아니지만, 잘츠부르크 헬부른 궁전 정원 달리아


그러다가 내 키보다 더 큰 달리아가 색깔별로 피어 있는 어느 정원에서는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밀고 말았다. 그때 운동복을 입고 자전거를 끌며 앞집으로 들어가던 아가씨가 나를 불렀다.


내가 뭐 도와줄까?
괜찮아. 이 동네 집과 정원이 너무 예뻐서 사진 찍고 있어.
그렇구나. 하지만 난 네가 사진을 안 찍었으면 좋겠어.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미안해. 사진 찍지 않을게.


멜크 수도원이나 수도원 정원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과 멜크에 사는 사람들의 집이나 정원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관광지에 사는 탓이니 감수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서울에서도 북촌에 사는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다니는 관광객들 때문에 생활이 힘들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쩌다 한 번 여행을 간 사람들이야 관광지의 모습이 신기하고 아름다워서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이라고 말하겠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사생활이 남의 카메라에 담기는 불쾌함도 분명 있었으리라.


이름 모를 멜크 아가씨, 미안해요. 나 그 사진 지웠어요.
앞으로는 반드시 허락받고 사진 찍을게요.



그다음부터 사진을 찍고 싶을 때는 항상 먼저 물었다. 한 번도 안 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흔쾌히 허락한 사람은 그라츠에서 만난 박사님이었다.


그라츠 대학 식물원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 보았다. 커다란 유리 온실 두 개와 넓은 정원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입장료를 내고 봐야 하는 정원들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온실 안에는 열대 식물, 선인장, 다육 식물이, 바깥에는 고산 식물과 다양한 야생화와 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치에 포도나무를 종류별로 심어서 만든 정원도 특색 있었다. 연못에는 수련도 제법 많았는데, 여름이 지나서 꽃을 많이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아침 일찍 식물원에 가서 세 시간 넘게 걸어 다녔지만 전혀 지겹지 않았다.


그라츠 대학 식물원


점심 무렵, 본관처럼 보이는 큰 건물 앞 연못가에 사람들이 수레로 테이블을 나르고 있었다. 옷차림도 심상치 않았다. 나비넥타이를 맨 남자 하나에, 화려한 레이스 스커트를 입은 여자 하나, 엄마 손을 잡고 온 어린이와 나이가 지긋한 부부도 함께 있는 특이한 모임이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물었다.


여기서 뭐 하니?
우리 파티해!
무슨 파티?
나 방금 박사 논문 통과 돼서 하는 축하 파티야!
초록색 치마를 입은 분이 박사님!
우와 대단한데!
파티하는 모습 사진 찍어도 돼?
그럼 그럼!!! 마음껏 찍어.
저기 내 아이도 유모차에서 자고 있어.
우린 모든 걸 다 준비했지.


벤치 앞 유모차 안 낮잠 자는 박사님 아기


그러면서 아이스박스 가득 채워온 와인과 맥주를 보여 주었다.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는 와인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할 것 같아서 축하한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박사님의 파티에 초대받은 여자들은 레이스 치마를 입고 왔다. 아마 그날 파티의 드레스 코드가 ‘레이스’였던 모양이다. 정원을 나오면서 만난 여자들은 꽃무늬에 레이스를 덧댄 치마를 입고, 꽃다발을 든 채 파티 장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파티에 가는 사람들


한가로운 정원에서 파티를 즐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 동안 논문과 씨름했을까? 박사님, 웃음소리 끊이지 않던 그날의 파티를 사진으로 남겨도 된다고 허락해 주어서 고마웠어요!


사진-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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