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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전ING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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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래냉이씀바귀 Mar 27. 2022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장자』 내편의 「덕충부」 속에는 덕이 충만한 사람의 모습으로 발뒤꿈치가 잘린 절름발이, 꼽추, 언청이 등으로 묘사하는데, 보이는 것에 흔들리는 우리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모습들이다. 왜 굳이 이런 형상들로 덕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발뒤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왕태는 따르는 제자가 공자를 따르는 제자들의 숫자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공자의 제자 상계는 절름발이인 왕태가 특별히 가르치는 것도 주장하는 바도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사람들은 텅 빈 채로 가서 가득 찬 채로 돌아오는지, 그리고 말없는 가르침이란 게 있어서 정말  드러내지 않아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인지를 공자에게 묻는다. 상계의 질문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 唯止能止衆止.

사람들은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멈추어 있는 물을 거울로 삼는다.

오직 멈추어(止) 있는 존재만이 멈춤을 구하는 여러 사물들을 멈출 수 있다.”     

‘흐르는 물’과 ‘멈추어 있는 물’이 무엇을 의미할까? ‘흐르는 물’은 몹시도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멈추어 있는 물’은 흔들리지 않는 참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 참된 모습은 또 무엇일까? 일 분, 일 초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우리 마음이 참된 모습을 가질 수는 있을까?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왕태를 ‘멈추어 있는 물(止水)’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죽음과 삶에도 동요되지 않고 세상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지닌 사람을 의미한다.

-절름발이 신도가와 정나라 재상인 자산은 같은 스승 백혼무인을 모시고 있다. 자산은 절름발이인 신도가와 같이 있는 그 자체를 부끄러워해서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가 남아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남아 있겠네."라고 한다. 그러자 신도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19년 동안 스승님과 있을 때는 절름발이임을 의식하지 못했네. 그런데 그대와 나는 육체의 내면에서 교우하고 있는데도 어째서 육체 밖의 모습에서 나를 찾는가?"

-인기지리무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언청이에다가 절름발이, 꼽추인 사람인데 위 영공(衛 靈公)에게 유세를 하자 영공이 기뻐했다. 그 후 영공은 온전한 사람들을 보면 목이 가늘고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제 환공(齊 桓公)에게도 항아리만 한 혹이 붙은 옹앙대영이 유세하자 환공이 기뻐했다. 그 뒤로는 환공도 오히려 온전한 사람을 보면 목이 가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장자의 이야기 속에는 이렇게 처음에는 언뜻 수긍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형상의 소유자들이 나온다. 「덕충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그 외형의 정도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래서 마치 이런 형상의 사람들은 우리와 먼 거리,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느껴지지만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인기지리무신이나 옹앙대영, 신도가, 왕태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발뒤꿈치가 잘린 절름발이, 꼽추, 언청이 이런 형상들을 통해 장자가 굳이 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덕이 충만한 이들의 형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덕충부』에서는 모두 신체의 외형을 논하고 있지만 사실은 신체의 외형뿐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외물이라는 요물에 흔들리는 것을 보게 한다.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덕(德)이 뛰어나면 외형은 잊어버리는데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니 이것을 일러 정말 잊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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