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세 번째 일요일, 여느 때 같았으면 이부자리 속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을 이른 시각, 난 어제 간단히 준비해 놓은 재료로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몇 줄은 남편과 아들의 아침을 위해 찬 통에 담아두고, 두 줄은 점심용 도시락으로 따로 준비했다. 혹시나 싶어 미리 삶아 놓은 고구마와 계란도 몇 알 챙겼다.
휴대폰 시계가 8시 25분을 알리자 챙겨놓은 도시락과 간단한 소지품들을 담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요즘 들어 심상찮은 꽃샘추위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바람이 더 이상 내 몸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옷을 단단히 여몄다.
내가 향한 곳은 걸어서 20분가량 걸리는 작은 테이크아웃 카페, 다름 아닌 나의 첫 알바 장소였다.
일주일 전, 이전에 알바 자리를 고사한 바 있는 카페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나의 스케줄상 토요일 오후가 안되면 일요일 오전으로 시간을 변경하여 근무하는 것은 가능한 지 타진해 온 것이다. 모임이 있는 4월 마지막 주는 시간을 빼주겠다며 제법 완화(?)된 제안을 해왔기에 나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지금 나로서는커피에 관해 배운 것을 어디에서든 활용하고 싶은 열망이 컸다. 이대로 흐지부지 시간을 보냈다간 기술이랍시고 익힌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그저 사장되는 수순을 밟을 것이 뻔하기에,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지난주 토요일 제안을 받고, 난 다음날인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2시간씩 교육을 받기 위해 카페로출퇴근을 했다. 사장님이 권한 시간은 12시부터 2시, 점심식사를 마친 근처 회사원들이 입가심할 음료를 위해 카페를 찾는, 가장 바쁜 시간대였다.
말이 교육이지 난 사장과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하는 일을 주시하거나, 시키는 간단한 일들을 거드는 수준이었다.따로 교육이란 건 없었고 번잡한 시간에 다양한 음료가 많이 나가니 직접 부딪쳐서 배우라는 뜻인 것 같았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다. 시간을 내어 교육이란 걸 따로 해주는 줄 알았는데 50여 가지 이상되는 음료의 제조를 옆에서 지켜보며 내가 직접 묻고 알아내야 하는 과정에다름 아니었다.
사장은 처음 대면했을 때의 그 무뚝뚝한 이미지 그대로 나에게 눈길 주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듯 보여서 감히 말을 걸지 못하고, 다소 붙임성 있는 어린 아르바이트생에게 이것저것 물으면 지도편달을 받았다.
어차피 채용할 거면 빨리 익힐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가르쳐주면 좋을 텐데... 어쩌면 사장 또한 수많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치여 마음을 쉽게 드러내는 법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 아쉬움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보조 업무를 익히느라 눈코뜰 새 없이바쁜 나날을보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점심시간 2시간을 열심히 보조하며 궁금한 것을 묻고 익힌 후, 집에 와서 사진으로 찍어온 레시피를 다시 공부하고 유튜브 보기를 반복한 지 일주일쯤 지나자, 나도 모르게 메뉴가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글을 배우기 전, 벽이나 문에 붙어있는, 한글로 빼곡히 들어찬 브로마이드를 처음 대했을 때의 아이 심정이 이랬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외계 언어들에 다름 아닌 메뉴의 나열이 가져다주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막막함... 그러나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수많은 수수께끼들이모스 부호를 해독해 내듯 하나하나 익숙하게 다가올 때의 그 놀라움이란!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난 본격적인 근무를 해보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이번 일요일부터 일에 숙련된 알바와 한 번 해보라는 사장의 승낙이 떨어졌다.
바람이 다소 쌀쌀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주말 이른 시간임에도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내가 잠든 시간에도 깨어있는 세상... 그날은 나도 부지런한 그들에 속해있다는 생각에 잠시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첫날이라 오픈 과정도 봐야 해서 혹시 늦을까 봐 발걸음을 서둘렀다.
8시 40분, 출근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했다. 좀 일찍 출근한다는 알바는 9시를 막 넘긴 시간에 헐레벌떡 달려와미안하다 말하며 카페문을 열기 시작했다.
먼저 보안 프로그램을 해제한 뒤 비밀번호로 도어록을 해제하고... 나는 어느새 집요한 학생이 되어 그녀가 오픈하는 과정을 꼼꼼히 살피며 애매한 것은 되묻곤 했다. 그리고 다음 과정으로 포스기 다루는 법을 지켜보며 그 요령 또한 익혔다.
다소 긴장한 나는 다음에 혼자 할 때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하나하나 되새기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직접 해보기까지는 두려움이라는 썩 반갑지 않은 녀석이 늘 마음 한편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렇게 음료제조와 기타 제반사항을 익히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장장 8시간의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침부터, 아니 일주일 내내 긴장한 탓인지 한 발짝씩 내딛는 걸음걸음이, 발에 쇠사슬이라도 매달아 놓은 듯 천근만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을 그만두고 근 1년 동안 이렇게 긴 노동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평소 잘 쓰지도 않는 몸을 이용한 육체노동을...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아우성치던 과거의 내 모습이 철없는 응석받이의 하소연처럼 느껴져 살짝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멈추거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나이에 이런 기회를 다시 얻는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이 일이 나에게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더 철저히 부딪치며 몸소 겪어야 했다. 하나씩 선택지를 마련하고 또한 그것을 미련 없이 버려야 하는 작업도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난 어쩌면 힘겹게 찾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버리기 위한 과정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씩 구하고 또한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것, 자칫 무모해 보일지 모르는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나에게 남을 진정한 그 무엇을 대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처럼,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을 찾기 위한 나의 이 무모한 도전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