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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숲풀 Mar 27. 2022

이상한 나라의 무명씨(2)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한 작은 시작(2)

선택지가 없었어

친구 A의 수술은 잘 되었고 이제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물론 그것 또한 힘든 과정이지만 다행히 나라에서 지원도 많이 해주고 A의 회사에서도 유급 휴직 처리를 해주어 A는 비교적 걱정 없이 주변인의 응원을 받으며 치료할 수 있었다.     

친구 B의 말도 생각나고 암도 잘 이겨내는 친구 A를 보며 내가 왜 못하냐며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역시나 내 다리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검색창에 ‘정형외과’, ‘다리뼈 부러짐’, ‘부작용’을 검색해본다.      


누구보다 건강해 보였던 연예인이 자신의 발목뼈 치료 경험을 얘기하는 글이 보인다.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라 아프다는 사실이 소문나면 연기를 못 할까 봐 두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대로 있다가는 아예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손가락질을 뒤로하고 적극적인 치료를 받은 덕분에 지금은 가볍게 뛰는 액션 신 정도는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약 부작용도 있었지만 미미했다고 치료를 권장한다.           


스크롤을 쭉 내렸다.     


응원하는 글도 많았으나 비난하는 댓글이 많이 눈에 띈다. 이런 연예인도 손가락질을 받는데 내가 과연 병원에 가도 되는 걸까? 약을 받아오면 큰일 난 것처럼 걱정하고 매일 한숨을 쉴 가족이, 그리고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나를 비난하는 친구와 지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병원은 정말 심각한 상황에만 가야지. 스스로 이겨내야 해. 다시 다짐하지만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든다.            



친구 A는 수술도 잘 되었고 1기라 금방 나을 것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합병증으로 췌장염이 와서 지칠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A의 주치의 선생님이 자신은 위암 2기도 이겨낸 경험이 있다며 A의 마음을 잘 다독이고 지치지 않도록 이끌어 주셨다고 했다.           


무급 휴직이 길어질수록 주머니 사정은 당연히 안 좋아졌다. 그 무렵 회사로부터 근무 조건을 바꾸어 시간제로 사무업무만이라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출근하니 이렇게 사무업무를 하면서 다리가 회복되면 복귀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힘이 났다. F 팀장님도 내심 미안했는지 나를 돕는다면서 사무업무에 여유가 있을 때는 계단 오르는 연습을 해보자고 하셨다. 자꾸 연습해야 나중에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애물 보고를 드렸음에도 자신이 상부 보고를 미뤄 다친 나에게 조심하지 않았다고 화만 냈던 F 팀장님이 너무 미웠었다. 하지만 직접 돕겠다고 나서는 모습에 분하지만 믿어보고 싶었다.          

당연히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난간을 잡고 오른쪽 다리에 주로 힘을 주어 올라가는 연습을 하자 한 계단, 두 계단 오를 수 있었다. 며칠 후에는 한 층, 또 며칠 후에는 두 층, 그렇게 점점 늘어났다. 어느새 5층도 다닐 만 해졌다. 그런데 F 팀장님은 6층도, 7층도 강요했다.           


F 팀장님 : 네가 나 아니면 뭐 3층이라도 올랐을 것 같아?

           고마운 줄 알고 하라면 하지?

나 : 감사하죠.

     근데 좀, 너무 오늘은 많이 한 것 같길래요.

     사실 오른쪽 다리도 아프기 시작한 거 같아요.

     이만하면 안 될까요?

F 팀장님 : 넌 왜 그렇게 생각이 짧아? 멍청하긴.

           야, 7층까지 올라봐야 5층을 쉽게 가지.

           너 회복해야 정규직으로 다시 복귀할 거 아냐?

           지금 좀 아프다고 관두면 되겠니?  


주춤거리자 벌레 보는 표정으로 또 한마디 한다.          

F 팀장님 : 진짜 한심하다.

           이렇게 도와줘도 못하는데 네가 앞으로 뭘 하겠어?          


그래, 아픈 건 기분 탓이겠지. 다시 오른다. 겨우 겨우 7층에 도착했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양쪽 다리의 아픔이 더 커서 서럽기만 했다. 눈물이 가득 맺힌 채 F 팀장님을 쳐다봤다.         


F 팀장님 : 그것 봐라! 하면 되잖아.

           역시 나밖에 없지?

           잘 내려와.          


F 팀장님은 신나게 웃고 있었다.    


누가 악역인가?

이제 5층은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왼쪽 다리는 여전히 아팠고 기분 탓인지 오른쪽 다리도 욱신거리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F 팀장님이 사실은 나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운 마음이 자꾸 든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난 참 못됐나 보다.          


회사 복귀 소식을 듣고 친구 B가 회사 근처로 놀러 왔다.          


친구 B : 계단도 잘 오르고 사무업무로 복귀해서 돈도 번다며?

         근데 또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지친 표정이야?

         너 요즘 예전과는 다르게 잘 웃지도 않고 어두워 보이는 거 알아?

         걱정돼.     

나 : 그렇지, 계단 오를 수 있지.

     근데 다리는 더 아픈 거 같고 그 과정도 너무 고통스러웠거든.

     그래서 그런가. 모르겠다.

친구 B : 에이. 그건 당연하지.

         A는 수술하고 항암치료도 받는데 어디 쉬웠겠어?

나 : 그렇지.

친구 B :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다들 힘든데 서로 모르는 거지 뭐.

         좀 더 버텨봐.

나 :...... 응. 그래.               


친구 B와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 양쪽 다리 모두 통증이 느껴져 걷기도 힘들었다. 심각한 것 같아 더는 걷지 못하고 앉아 있는데 친구 Z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Z도 A와 약간의 친분이 있었던 터라 A의 근황을 물어왔다.           


친구 Z : A 암이라며? 괜찮대?

나 : 응 다행히 1기이고 잘 이겨내고 있대!

친구 Z : 다행이다. 우리 언니 친구도 무슨 암인지는 모르지만 2기였는데 완치됐대!

         처음에는 해외에 혼자 있을 때라서 병원비도 비싸고 지지해주는 사람도 곁에

         없어서 힘들었는데, 한국 들어와서 확실히 좋아졌대. A한테 전해줘!

         너는 별일 없고?

나 : 난 사실 다리 다쳐서 쉬다가 시간제로 복직해 있어.

친구 Z : 정말? 다리는 괜찮아진 거야?      

    

Z의 언니 친구 소식을 들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F 팀장님 얘기를 하게 되었다.          


나 : F 팀장님은 다리 다칠 때 사건으로 너무 미운데 그래도 유일하게 나를 돕는 사람이야.

     네가 말한 그 언니도, A도 도와주는 사람들 덕분에 이겨냈다는데, 나는 왜 이럴까?

     F 팀장님은 나 돕는 건데. 강요당하고 욕먹었다고 미운 감정이 또 올라오더라고.

     가족이나 친구들도 직접 못 돕지만 그래도 다 나를 사랑하니까 힘내라고 노력하고

     버티라고 말해주는 거잖아.

     근데 안되는데 자꾸 들으니까 내가 한심하고 속상해서 그것도 사실은 듣기가 싫어.

     아파서 예민한 건가?

친구 Z : 다리도 아픈데 많이 속상했구나.

         있잖아. 아까 말한 그 암 2기였던 언니 친구가 그랬대.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옛날에 너무 아파서 살기 싫었으니까 다시는 돌아가기 싫다고 말이야.

         아마 너도 지금 그 단계를 밟고 있는 거일 거야!

나 : 그게 무슨 뜻이야?

친구 Z : 어떤 사람들은 지금 죽겠다고 과거만 떠올리면서 후회한다며?

         근데 너는 지금이 힘든 단계잖아.

         힘들게 느껴지겠지만 다 지나가는 거고 ‘나중에 행복하기 위한 거다’하라는 거지.

         누가 잘했네, 못했네, 하지 말고 회복에만 집중해봐!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 : 아... 고마워. 오랜만인데 너무 안 좋은 얘기만 한 것 같네.

     조만간 보자!

친구 Z : 응! 그러자! 속상해하지 말고 잘 들어가!            



친구 Z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자 마음이 복잡하다. 그리고 괜히 다리가 더 아픈 느낌이 든다. 결국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내렸다. 못 버티고 택시를 탄 나 자신에 또 한 차례 실망할 때쯤 근처 놀이터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남자분이 아이가 놀이터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래 속에 유리 조각이 있었고 모른 채 손을 휘젓다가 손가락이 크게 베여 한마디로 너덜너덜 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119에 전화하지 않고 그의 아내로 보이는 사람은 거즈만 가져와 남편의 손을 감싸며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괜찮아? 많이 아파? 아휴, 그래도 견디자. 버텨봐. 할 수 있어!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을 순간으로 기억될 거야! 제발 그것만 기억해! 병원 가면 기록 남는 거 알지? 아예 잘린 것도 아니잖아. 일단 노력을 해보자. 그래도 아프면 그때 아프다고 해도 늦지 않아! 다 그렇게 살아.”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아이 아빠의 얼굴에서 왠지 내가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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