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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May 21. 2023

연길의 봄밤은 짧아

걸어 여행자야

很香!


5월, 한국에서의 저녁도 이랬던가. 갓 우려낸 차가 그렇듯, 고이 잠든 아가의 숨결이 그렇듯, 요즘 연길 저녁은 너무도 향기롭다. 깨끗하고 뜻한 공기, 멀리 백두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살랑살랑 흔들리는 가로수들, 봄날의 송이 버들솜들, 푸른 저녁 바탕에 스며든 낭만적인 주황 가로등. 설레는 여름에의 기대로 부쩍 길어진 저녁이면 어디로든 걷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퇴근 후, 낮 동안의 온갖 번뇌로 녹초가 된 몸. 어질러진 옷가지들, 전구가 나간 지 오래된 거실 천장등. 소파에 앉아 어둑해지는 창 밖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점점 더 가라앉기만 하는 나를 일으켜 운동화를 꿰어 신는다.


오늘 저녁은 연길 거리를 걷는다.


오라는 곳도 갈 곳도 없지만 두 다리의 경쾌한 움직임에 집중하며 일단 걷는다. 오래전 틱톡에서 사놓은 할인쿠폰 생각이 난다. 줄이 너무 길어 낮에는 살 엄두조차 안 나던 돌돌이 빵.


요즘 연길 대박 메뉴 돌돌이 빵, 두 시간 쯤 줄을 서야 살 수 있다.

파장 시간이 가까워 줄이 많 줄어있다. 다섯 명 남짓 서 있는 줄 뒤로 기분 좋게 선다. 자신의 차례가 되었어도 빵이 다 구워지려면 3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드디어 나도 연길 현지인이 된 건가, 돌돌이 빵을 먹어본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한다. 부드러운 버터 코팅 위에 설탕까지 뿌려진 갓 구운 빵이 맛없을 리가 없다. 어린아이처럼, 산 그 자리에서 맨손으로 빵을 돌돌돌 풀어 먹고 있는데, 문득 들려오는 귀에 익은 노랫소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오늘은 우리 함께 같이 걸어요
이 거리를~



여기가 중국이 맞나? 내 귀를 의심한다. 대한민국 봄 주제가, <벚꽃엔딩>이다. 누군가가 이 곡을 라이브로 부르고 있다. 심지어 오랜 시간 연습을 많이 했는지 음색이나 창법도 원곡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랫소리에 이끌려 길 건너 백리성 백화점 광장으로 간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버스킹 중이다. 무슨 행사, 프로모션 아니고 그냥 가수지망생들이 자기들끼리 좋아서 노래판을 벌인 것 같다. 관객도 제법 모여 있다. 따라부르는 사람도 있고 폰을 들고 녹화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 노래를 이토록 유창하게 부르는 걸 보니 조선족 청소년들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곡은 애절한 중국 발라드다.


온몸이 찌릿해지는, 너무도 독특하고 감동적인 풍경이다. 타국에서 누군가가 유창하게 부르는 모국의 유행가를 들을 수 있는 곳, 연길은 바로 그런 곳이다. 나라는 다르지만 우리는 한국어(연변어)와 한글을 공유한다. 김치와 떡을 먹고 특별한 날에는 한복을 입는다. 우리는 똑같이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고(윤동주의 생가도 근처에 있다) 매년 봄이면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즐긴다. 우리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고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 연길은 한국이 있어 든든하고 한국은 연길이 있어 더욱 풍부해진다.


2020년 2월, 코로나 팬데믹이 갓 시작되었을 때 처음 연길에 들어와 지금까지 4년살았고 이제 8개월 후면 이곳을 떠난다. 학교가 폐쇄되 몇 달 동안 원격수업을 하기도 하고, 영하의 날씨에 한 시간 넘게 줄을 서며 핵산검사를 받던 때도 있었다. 어느덧 그 추운 시간들 다 지나고 연길에 봄이, 진짜 봄이 돌아온 듯하다.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올해는   애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중국 속의 한국, 연길에서의 남은 시간이 짧다. 연길의 향기로운 밤은 더욱 짧다.  부지런히 걸어 다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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