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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천우 Oct 04. 2023

백두산, 천지를 못 보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12일간의, 추석 + 국경절 더블연휴(双假). 한국에서 찾아반가운 지인과 백두산에 갔다.


 연길에서 살아온 지난 4년 간, 백두산은 총 5번을 가 본다. 서파 2번, 남파 2번, 그리고 이번, 북파 1번. 천 사백 개의 계단을 올라갔던 서파에서는 두  당연한 듯 탁 트인 천지를 보았다. 하지만 북한과의 경계에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은 남파에서는 천지를 한 번도 못 보았. 작년에 갔을 때는, 전날 밤 내린 폭우로 남파 가는 유일한 국도가 유실되어 입구도 못 가봤, 올해 7월에 온갖 검문을 통과 어렵게 산 정상까지 올라갔으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두꺼운 안개와 살벌한 추위 속에 궁상맞게 떨기만 하다 결국 천지를  보고 내려왔었다.


백두산 남파 정상, 7월 임에도 살을 에이는 추위. 바로 앞 천지가 보이지 않는다.


두산 = 천지라는 통념이 있다. 백두산을 갔어도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지를 못 보고 내려왔다면 백두산을 다녀왔다고 말하기가 찜찜하다.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하고 비싼 항공료와 입장료를 부담하고  시간 동안 줄을 서 풍경 전기 버스를 수차례 갈아탔어도 천지를 못 보고 왔다면 그 모든 비용과 노력들수포가 되고 만다.


황금연휴 기간이라  서는 시간만 5시간이 넘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3일 전부터만 판매하는 백두산 입장권은 물론이고 백두산까지 가는 기차표 구하기 쉽지 않았다. 지인이 연길에 머무는 시간은 단 3일, 백두산을 꼭 가야 할까, 대신 내가 좋아하는 연길시내 모아산에 데려가면 서운해할까, 고민도 많았다. 중국 관광지에서 '인산인해 트라우마'를 겪어본 적 없는 지인은 내가 물어볼 때마다 해맑게 대답했다. "민족의 영산인데 백두산은 꼭 가야지. "  


이래도 갈 것인가, 민족의 영산, 抖音 캡쳐


당일 새벽, 백두산 입장권을 겨우 구 우여곡절 끝에 백두산 기차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가 하는 말,


산 정상 강풍으로 오늘 천지 등반은 금지됐대요.  산 아래 장백폭포나 녹연담 등은 볼 수 있어요. 산 아래 날씨는 이렇게 좋은데, 참...

 

처음에는 '아이고, 오늘 재수 옴 붙었구나!' 했다. 다른 중국인 관광객들처럼 오늘 등반을 취소하고 산아래 숙소에서 1박 하며 내일을 노릴 상황도 못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한산한 입구를 통과해 장백폭포로 향했다.

 

밑진 듯 서운한 마음도 잠시, 천지를 포기하니 백두산 풍경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곳곳의 대기시간도 10분을 넘지 않았다!(이런 행운이!) 장백폭포를 올라갔다 녹연담까지 내려오는 긴 데크길도 느긋하게 걸었다. 느닷없이 길이 막히기도 했는데 도토리 까먹는 '백두산 다람쥐'를 경탄하며 관찰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백두산에 김이 허옇게 올라오는 온천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백두산 화산 폭발설이 진짜라는 말?) 그 온천물로 즉석에서 삶은 계란도 처음 먹어 보았다. 시중가 대비 10배의 가격에도 어찌나 불티나게 팔리던지 '백두산 계란 재벌' 아저씨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멀리 검은 산등성이들은 웅장했고 가을 초입을 맞은 나무들은 의연하고 아름다웠다. 계곡을 흘러내리는 힘찬 물소리는 마치 태풍이 부는 것 같았다. 고요한 소천지(小天池)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인생길에서 그 어떤 빌런을 만나더라도 소천지 같은 평정심을 갖자고 꾹꾹 다짐했다.



다섯 번이나 왔어도, 늘 단체버스로 왔다가 시간에 쫓겨 천지만 찍고 쌩 떠나던 백두산에 이렇게 오래 머물기는 처음이었. 직접 발로 디뎌보고 오랫동안 눈에 담아 보니 이제야 비로소, 관광상품 아닌 백두산 그대로의 모이 보다.


백두산 트레킹로를 걸으며 4년 전 떠나온 그곳에서 우리가 함께 알던 사람들 근황을 전해 들었다. 그전에도 그렇게 안하무인이던 누구는 이제 더 높고 중요한 자리에서 더욱 안하무인이란다. 그토록 훌륭한 작업을 해내고도 성실하고 인간적 모습을 잃지 않던 누구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질환 진단을 받고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단다. 그렇게 여리여리 어여쁘던 누구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소박하던 누구는 이제 온몸에 금붙이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황금마니아가 되었단다. 늦도록 아이가 없어 근심이던 누구 부부는 마침내 아이를 낳았단다.


그리고, 그 사람 이야기를 들었다. 가정도 건강도 돌보지 않고 정상만을 향해 줄곧 나아가던 그 사람. 그토록 유능하고 자신만만하던 사람. 너무 잘 나가서 사람들의 선망과 시샘의 대상이던 사람. 정상을 바로 지척에 둔 자리에서, 그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 커리어 전체가 한순 박살나고 말았다는 이야기. 자부심으로 빛나던 그의 인생 전체가 이제는 한낱 가십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 스스로를 얼마나 자책했을지, 또 가족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지, 마음이 아팠다.


멀리, 천지가 있 백두산 주봉(主峰)을 바라본다. 하늘이 흐리다. 백두산의 날씨는 내 통제 밖이다. 어떤 조건이든 그저 감사하며 기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천지가 아니어도 백두산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다. 기진맥진해지도록 타인에 시달리며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 정상을 포기해도 여전히 삶을 향유할  있다. 그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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