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모닥불 Oct 06. 2023

10주 차 :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장애인 이동권

"잔디 머리끈 사러 유모차 끌고 시장이나 가볼까?"

- 2023년 6월 17일 -


잔디의 머리가 제법 자랐다. 여자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의 로망이 머리를 묶어주고 땋아주는 것이라던데. 아내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전통시장까지는 걸어서 30분이 넘는 거리인데 지금까지 유모차를 그렇게 먼 곳까지 끌고 가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유모차를 태운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마저도 아파트 단지 안을 산책하는 정도였을 뿐인데 전통시장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해 보였다. 이제 막 생후 2개월이 지난 잔디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은 나에게는 아직은 낯설고 어색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아내는 확실히 나보다 육아의 모든 면에서 나보다 경험하고 느낀 것이 더 많아서인지 처음 해보는 장거리 유모차 이동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덕분에 잔디의 첫 장거리 유모차 이 시작되었다.


전통시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가장 많이 신경이 쓰였던 것은 바로 횡단보도였다. 평소에 혼자 걸어 다닐 때는 별 신경 안 쓰고 무심코 건너던 횡단보도였지만 유모차를 끌고 건너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보통 횡단보도 앞에는 보행자가 다니는 길인 '보도'와 차가 다니는 길인 '차도' 사이에 있는 턱의 단차를 최소화해 주는 턱낮춤 시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모차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니 이 턱낮춤 시설이 100% 완벽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로변의 횡단보도는 대부분 턱낮춤 시설이 잘 되어 있었지만 구석진 길이나 좁은 골목길 쪽에는 단차가 생각보다 높거나 그 폭이 좁은 곳이 많았으며 심지어는 파손이 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한 곳에서는 횡단보도로 내려갈 때마다 유모차의 바퀴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을 세게 받기 일쑤였다. 유모차에 탄 잔디도 놀란 표정이었고 이를 바라보는 나와 아내도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높이가 더 를 건너서 높은 보도올라가는 상황 과연 어땠을까? 그때마다 역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보도 앞에 부딪히면서 멈춰 서야만 했다. 전통시장으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턱낮춤 시설이 미비했던 지점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그대로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 아내와 나는 유모차 앞바퀴를 살짝 든 채로 이동하거나, 아예 뒤로 돌아서서 뒷바퀴부터 살며시 올리거나 내려서 충격을 최소화하는 등 나름의 대응 방안을 터득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했던가. 아니 경험하는 만큼 보인다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유모차를 끌어 보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것은 약과일 수도 있다. 유모차는 상황에 따라서 단차가 있는 지점을 지나가야 할 때 아내와 내가 터득했던 방법처럼 조금씩 들고서라도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장애인이나 노약자의 경우는 어떨까? 안 그래도 몸이 불편한 상태인데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가면서 이동하거나 아예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서 뒤로 돌아서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와 더불어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이었다. 평소에 걸어 다닐 때에는 그냥 노란색일 뿐이었던 점자블록들은 유모차를 끌고 가는 나에게 어느새 장애물이 되어 있었다. 보도가 넓은 곳에서는 가급적 노란 점자블록 양 옆으로 지나가면 상관없었지만 길이 좁아지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위를 지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에게 길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선형 점자블록 위로 유모차가 지나갈 때 바퀴가 양옆으로 흔들리면서 나도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앞으로 제대로 가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시각장애인들에게 보도가 끝나고 차도가 시작되는 위험 지역임을 알려주는 울퉁불퉁한 점형 점자블록 위를 지나갈 때도 유모차 바퀴는 컹거리면서 심하게 흔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점자블록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불편함은 유모차를 끌고 가는 나뿐만 아니라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느껴질 수 있겠다 싶었다.


나에게 노란 점자블록들은 이제 더 이상 단순시각적으로 구분되는 대상이 아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점자블록이 많을 뿐 아니라 그 경로 중간에 전기시설물이나 맨홀 등이 설치되어 있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두 눈 멀쩡히 잘 보이는 나에게는 유모차를 끌고 지나갈 잠시동안만 참으면 되는 작디작은 불편함일 뿐이다. 하지만 점자블록에 의지해야만 앞으로 걸어수 있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생사를 넘나들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모차를 끌고 전통시장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횡단보도 턱낮춤시설과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의 존재를 재발견한 셈이었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서울시에서 2019년부터 2020년까지 2년간 서울시 전역의 보행 불편사항 실태 전수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총 1671km의 거리를 장애인이 직접 보행하면서 불편사항을 조사한 것인데 조사항목 중 1위가 '횡단보도 턱낮춤 및 점자블록 시설'로 총 지적건수 7만 4320건 중 40.5%인 3만 114건을 차지했다고 한다. 내가 이번에 느꼈던 것들 어쩜 그리 똑같조사 결과 이미 나와 있었던 건지.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구성원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 사회일 터인데 그 안에서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나 잘 알지 못했던 영역들이 나와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2021년 말부작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시간대 지하철 시위가 한창 사회적 이슈로 부각 있다. 이 시위의 목적과 요구사항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주요한 쟁점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관한 것들이다. 2001년 오이도역 휠체어 리트프 추락 사망사고 이후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20년 넘는 세월이 지났다. 사고 당시 13.74%에 불과하던 서울시 역사 엘리베이터 설치율은 현재 95% 이상까지 늘어났고 조만간 100% 달성이 예상되는 만큼 많은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시내 저상버스 도입률은 서울은 약 70%에 달하는 반면 전국 평균은 아직 30%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시외버스의 경우에는 아예 전무한 수준이라고 한다. 결국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인과 노약자의 지하철 이동권은 이제 어느 정도 보장이 되다고 볼 수 있지만 도보와 버스 통한 이동에 있어서는 많은 개선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늙고 쇠약해져서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 것이다. 열악한 횡단보도 턱낮춤시설 개선된다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나 노약자들, 그리고 유모차를 타는 아기들이 그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이 잘 정비되고 더 많아지는 것은 이들에게는 혜택이 아니라 불편함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점자블록 위로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야 하라도 그 정도의 불편 받아들여야 한다 다짐했다. 우리 사회 속에서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그 어떤 존재도, 특히 약자에 가까울수록 소외받는 일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로 인해 나도 출근길에 불편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이동권 보장에 대한 그들의 절박한 심정 조금이나마 가슴속으로 전달되고 있음을 느끼며 나지막이 외쳐본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러한 불편함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그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 ENFP인 저(남편)와 ESTJ인 아내가 남과 여, 각각의 시선에서 육아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아내의 시선 : 1주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