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랴 Apr 09. 2024

내 눈에만 보이지 않았던 길

산을 올랐다. 부모님이 앞서 걸었고 보기 좋게 우리는 길을 잃었다. 같은 곳에서 두 번이나 길을 잃다니, 참고로 동네 뒷산이었다.




똑같이 길을 잃었는데 내 눈에는 풀더미가 무성했다. 이 이상은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가자고 말하려는데 앞서가는 부모님은 조금 더 살펴보겠다고 하며 앞으로 전진하신다. 그러면서 길이 있으면 위로 올라가자고 하셨다.




그리고 길이 있었다.



앞서가는 그분들의 발걸음을 따르려고 원래 있던 자리에 서자 놀랍게도 여전히 길은 없었다. 수풀이 무성해서 헤쳐나가야 해서 길이 끊겨 있었다고 여겼으니까. 아니다. 길이 있었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반듯하고 깔끔한 길이 없었지. 낮은 수풀은 밟아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쓰러진 나무와 긴 수풀은 피하고 헤쳐나갔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갔다.




길이 있냐 없느냐의 차이는 단지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단단한 지반이 있는가, 길을 만들어서라도 갈 의지가 있는가, 길이 있다고 믿고 나아갈 자신을 믿는 확고한 믿음이 있으며 그걸 제대로 볼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였다.




정말로 길을 잃었고 길을 만들어서라도 올라갔으며 다 같이 정상까지 다다랐다. 이게 물리적으로만 있는 일인가, 어디서든 통용될 수 있는 일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아무 기반도 꾸준히 만들어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해낸 게 없는지 물어봐야 한다. 정말로 만들어놓은 게 쌓아둔 게 아예 없었는지 노력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고 정말로 놀거나 자기만 했는지를 점검해 본다. 이 부분만큼은 자기 자신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실하게 믿는다.




산에서 길을 만들어서 갔을 때 발을 디딜 땅과 잠시 붙잡을 나무가 있어도 충분했다. 지반이 단단하면 좋겠고 충분히 넓거나 많았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열악해도 발 디디고 앞으로 나갈 조금 무른 땅이어도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걸 오늘 배웠으니까.



적냐, 많냐, 보잘것없냐, 대단하냐가 아니라 뭔가가 있냐, 아무것도 없냐가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 고민은 진행하면서 하겠다.

이전 13화 무작정 나서서 돌아다닌 벚꽃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