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곳이다. 한 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20만이 넘는다. 그러나 이곳에 상주하는 인구는 고작 3만.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작은 시골을 벗어나겠다며 발버둥 치며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단양에서 시골 공무원으로 살고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가족이 살아오던 단양에서 나는 또다시 내 삶을 이어오고 있다.
직장과 학교, 어린이집 등 가고자 하는 모든 곳의 이동거리는 자차로 30분 내외, 밤 9시가 넘으면 조용히 잘 준비를 하는 안락하게 편히 쉴 수 있는 작은 동네.
하지만 이런 일상과 동네에 대해 아이가 생기면서 많은 것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편안하다는 말의 이면엔 불편하고 부족하단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을 내 아이를 만나면서부터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산부인과가 없다. 소아과도 없다. 당장 급한 응급실은 가기도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불편하다.
산 좋고 물 좋으니 아이가 아프지 않길 기도해야 했다. 아이용품은 인터넷 쇼핑이 유일하다. 한 해 태어나는 아이가 100명이 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러한 기반시설의 결핍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에겐 더 즐겁게 놀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놀이터에서 계곡에서 친구의 집에서 숲 속에서 어디에서든 놀 수 있다. 키즈카페도 없고 어린아이를 위한 문화센터도 없으니 그저 온몸으로 놀면 된다. 내 아이들도 꼭 어린 시절 나처럼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놀며 컸다.
그러나 첫 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하는 시점이 되자 슬슬 걱정이 몰려왔다. 도대체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저 녀석은 가까운 옆 동네 또래들만 해도 한글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울 텐데 그게 뭔지는 알까 싶어졌다. 엄마의 도리라는 게 아프지 않게 잘 먹이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면 족하다 생각한 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글은 깨치고이왕이면 ABC라도 알고 입학하면 오죽이나 좋을까? 나역시 그저 그런 똑똑한 아들 딸 둔 엄마가 되고파이 용을 쓰는 것일까? 아니다 이건 그저 본능인 거다. 엄마로서 자식이 양질의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래서 본인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게 부모 된 도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 들 주위를 둘러봤자 여전히 즐겁게 놀고 있는 내 아들 딸과 또래 친구들 뿐이고 이 작은 시골마을엔 눈을 씻고 뒤져봐도 미술 학원 2곳, 태권도장 2곳과 피아노 학원 몇 곳이 전부이니 저 세 가지 중에 하나씩 돌려가며 배울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뭐라도 하나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곳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혼자 앉아 가르치자니 공부가 아니어도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아들이 오죽이나 앉아서 나랑 글을 쓰고 알파벳을 쓸까
도대체 아이를 낳으라고 말만 하면 어쩌란 말인가? 배울 곳도 가르칠만한 사람도 없으면서.
괜히 심통이 났다. 그렇다고 고작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이사를 강행할 수도 없으니 시골마을 엄마로서 자격지심만 밀려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규로 입사한 예쁜 여자 후배가 한 말이 불쑥 생각이 났다.
"우리 외삼촌이 여기에서 교사를 하셨어요. 저기 분교에서 과학을 가르치셨는데 삼촌이 언어 배우는 걸 좋아하셔서 아이들에게 영어로 과학도 가르쳐주고 그러시던 분이세요. 이젠 정년 하셔서 인근 도시 분교아이들에게 무료로 영어 가르쳐 주고 계세요."
그래, 그거였다. 그 선생님께 아직 글도 모르지만 시골에서 놀기만 하는 꼬마들을 위해 영어 좀 가르쳐 달라 부탁해 볼까? 그분이라면 이곳에서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세상 행복하게 노는 꼬마들에게 뭐라도 좀 가르쳐 주지 않으실까?
그날로 후배에게 부탁했다.
" 혹시 외삼촌께서 이곳 단양에 거주하는 7세 아이들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 우리 집 첫 째가 이제 학교를 가야 하는데 뭐 하나 배울 만한 곳이 없어서..."
개미만큼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에 후배는 연락드린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아직 글도 모르고 지 이름 석자만 쓸 줄 아는 말썽쟁이가 고등학교 과학선생님께 뭘 배울 수 있긴 할까? 괜히 걱정부터 든다. 민폐가 아닐는지..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연락이 왔다. 선생님이시다.
" 안녕하세요. 어윤재입니다. 단양에 참 배울만한 곳이 없긴 해요. 혜민이에게 얘긴 잘 들었어요. 아들이 조금 어리긴 하지만 영어라는 게 어릴 때 배울수록 오히려 효과가 좋아요. 나도 젊은 시절에 가곡 분교에서 영어로 아이들 아침 6시부터 가르치기도 했었어요. 아이들에게 영어를 배우게 하시겠다 마음먹으셨다면 시작해 볼게요. 한 아이만 가르치는 것보단 또래들 중에 배우고자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다섯 명 정도만이라도 모아주세요. 그럼 저도 시간을 내볼게요. 친구들이 모이면 다시 연락을 주세요"
그때부터 내 마음이 급해졌다. 핸드폰에 저장된 엄마들에게 함께 하자고 전화를 돌렸다. 그런데 생각 외로 호응도가 낮았다. 애들이 건강하게 즐겁게 크면 됐지 뭐 벌써부터 유난이냐고 하는 엄마부터 애가 원하지 않으면 굳이 가르칠 생각이 없다는 엄마까지 행복한 시골마을엔 교육에 대한 열정보단 행복한 일상이 더 중요했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다. 어떻게 얻어낸 기회인데 이렇게 엎어지게 할 순 없지 않은가? 오며 가며 만난 아들의 친구부터 함께 근무하는 엄마들까지 만나 설득하기 시작했다. 정육점 집 첫째 딸 카페사장 네 첫째 딸과 후배직원의 아들까지 모조리 물어보고 다녔다. 내가 기필코 5명은 채우리라. 그래서 꼭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영어라도 배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리라. 그렇게 마지막 네 자녀 다둥이네 셋째까지 다섯 명의 아이들은 엄마에게 끌려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 한 자리에 모였다.
가을이 깊어 가던 2023년 11월
다섯 명의 아이들과 다섯 명의 엄마들 그리고 퇴직한 과학선생님은 5평짜리 공부방에서 처음으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