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됐건 내 자식의 영혼을 살 찌우기 위해선 남의 자식들도 살찌워야 하는 숙제가 부여됐다.
밤 9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엄마들은 뭔가할 말은 많은데 할 말을 할 수 없는 선택적 벙어리 상태가 된 듯했다.
" 날도 춥고 엄마들 술이나 한 잔 합시다. 30분 뒤에 저기 바로 밑 야식집에서 봐요. 강요는 안 할게. 밤도 늦었고 애들도 졸릴 시간이지만 이대로 집으로 가기엔 나뿐 아니라 모두들 뭔가 찜찜한 표정이니 맥주라도 한 잔 해요."
육아 산전수전을 겪으며 살아가는 육아 만렙 아줌마들에게 오밤중 술자리란 젊은 시절 다음 날 있을 소개팅보다도 설레는 이벤트다. 그렇지만 오늘은 남편 놈 찜쩌먹고 시엄니 찜쩌먹고 직장 상사 회 처먹는 그런 스토리가 아니다 보니 내심 머릿 속이 복잡했다.
비니네 엄마 뽀기, 카페여사장 미니엄마, 정육점 안주인 정미, 그리고 나.
맥주 한 잔 소주 한잔에 속내를 물어봤다.
" 어쩔래? 혹여라도 선생님이 요구한 것처럼 넓은 장소에서 많은 애들이 함께 배우게 되면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도 생길 거야."
뽀기도 미니엄마도 정미도
" 사실 지금이 더 좋긴 해요. 근데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고, 선생님의 취지는 분명히 알 것 같지만 아이들에게 과연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될는지는 확신을 못하겠어요."
침묵.
차라리 남편 욕을 하는 게 낫지. 술자리에서 이렇게 건설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건 오랜만이다.
" 좋게 생각하자. 학습적인 측면에선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함께 배운다는 것도 분명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건 선택지가 두 개 밖에 없어 보여. 함께 배우던가, 아니면 배우지 말던가."
다들 어쩔 수 없다며,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로 이야기를 덮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생각을 한 들 묘수가 없다면 그냥 끌리는 대로 결정할 뿐.
나란 인간은 기본적으로 E형이며, 비체계적이고 직관적인 인간이다. 매사 큰 고민 없이 저질러보거나 문제가 생기면 수정해 나간다. 모든 계획을 처음부터 짜지도 않고 누군가는 10수 앞을 본다는데 기껏해야 한 수도 못 보는 울트라 초긍정 덤벙덤벙 맘이다.
이런 성향 탓에 치밀함과는 거리가 멀고 닥쳐보고 경험 한 뒤에야 아.... 이 생각을 못했네? 그냥 지금이라도 바꾸자 식이다. 그렇다고 이런 성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크게 복잡하지 않으니 누굴 만나든 고민 없이 다가가고 인사 나누며 친분 쌓기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평소 큰 친분이 없더라도 작은 공직 바닥에서 오며 가며 인사 나누는 분은 꽤 있다. 굳이 어떤 의도가 있어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같은 직종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애환을 듣는 게 재밌고 여러 공직자들의 무용담을 함께 공유할 때면 나 역시 공직사회란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피어오르는 전투애를 함께 느낀다고 할까?
도서관 팀장님께 몇 분 간의 고심 끝에 전화를 드렸다. 팀장님과는 몇 달 전 가족관계 업무를 여쭤볼 일이 있어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용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 팀장님 안녕하세요.. 저기,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단양에 영유아들이 무언가 배울 곳이 많지 않아서 엄마들과 재능기부 선생님이 함께 영어공부를 좀 했으면 하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어요. 도서관에 공간이 있으면 대관을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팀장님은 참 조용조용 다정하신 분이시다. 여느 날 여느 때처럼 카스테라 빵이 우유에 녹 듯 답하셨다.
" 재능기부라면 혹시 선생님께서 비용을 전혀 받지 않으실까요? 그럼 대관이 됩니다. 취지도 좋아 보이고 도서관에 강의실이 하나밖에 없지만 미리 예약자가 있거나 저희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날 이외는 다수를 위한 무료강좌일 경우 대관을 신청하면 될 거 같아요. 요일과 시간을 좀 알려줄래요? 연령이나 그런 것들이 맞다면 우리가 겨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볼게요."
"네? 프로그램으로요? 정말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다고요? 아이들은 6세에서 7세까지 모집을 생각하고 있고요. 어린아이들이라 두 클래스로 모집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6세 반 아이 한 클래스, 7세 반 아이 한 클래스요, "
" 그럼 저희가 조금 정리를 해서 프로그램도 만들어보고 도서관 사이트에 공지사항으로 한 번 올려볼게요. 취지가 좋다면 개설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하지만 당부드릴 것이 하나 있는데 저희 도서관이 4월에 이사를 갑니다. 올누림도서관으로 옮겨야 하니 그때까지만 이용할 수 있어요."
어떤 조건이든 무슨 상관인가? 당장 우리에게 새로운 공공의 장소를 마련해 주실 뿐 아니라 아이들을 모을 수 있는 기회까지 직접 동참해 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너무나도 뻔해서 감동도 없는 저 문구가 내 심장을 치고 간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장소를 확보했다. 익명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그리하여 내 아이와 함께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작은 시골마을 너와 나 우리의 첫 학습둥지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