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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쥴리 Oct 20. 2023

나의 속도에 맞춰간다는 것

공무원 시험을 포기한 후, 아등바등하며 보냈던 지난날을 지나 드디어 백수를 탈출했다. 확실히 이전에 취업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를 충분히 탐색해 보고 얻게 된 직업이라서 그런지 더욱 감사하고 소중했다. 그래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이 직업이 나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와 맞는 유일한 길을 찾았어!'라고 외치던 25살의 내가 더 이상 아니었다.

공시생 포기 후에 너무 간절하게 얻은 첫 직장이라서 '나와 잘 맞기를..'하고 바란 적은 있지만, 설령 나와 잘 맞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라는 사람을 탐구한  처음으로 도전한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이 일이 나에게 맞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았. "해보고 싶은 것""직접 해보는 것"은 충분히 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직업 자체에 얽매이 않으려고 함과 동시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임하기로 다짐했다. 그래야 이 일이 나한테 맞는아닌지를 최대한 잘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신입사원 직무교육이 끝나고 이틀 뒤 바로 실무에 투입되었다.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하다 보니 바로바로 습득을 해야 했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조그만 수첩을 항상 유니폼 재킷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선배들이 업무 팁을 알려줄 때마다 즉각적으로 메모장을 펼쳤다. 근무 시간에 열심히 받아 적은 내용들은 쉬는 시간이나 퇴근 이후에 다시 찬찬히 살펴보며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항공 보안 인터뷰어의 주요 업무는 인터뷰지만, 탑승 전 보안 검색 대상자를 가려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순발력의 자질을 요구했던 이 업무는 항상 내게 긴장과 불안감을 주었다. 탑승 직전 보안 검색 대상자를 분류하는 일을 맡는 날에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빠르게 탑승하는 승객들 중에 검사받을 사람을 색출해 내는 것은 나의 모든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출국장 게이트 앞에서 탑승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면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자리로 갔다. 색출 담당을 맡는 날엔 검색 대상자 명단을 건네받는다. 출력된 용지를 받자마자 상단에 다음과 같이 큼지막하게 썼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형광펜 표시한 것만 찾자!" 빨간펜으로 별표를 난리치고 강조해 놨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항상 되뇌었다.


보안 검색 대상자 색출 용지


너무 긴장이 될 때는 승객들의 탑승이 시작되기 전 나만의 의식처럼 초콜릿을 챙겨 먹었다. '이 초콜릿을 먹었으니 나는 각성하고 잘 분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사히 끝마칠 때마다 '오늘도 해냈어!'라고 얼마나 뿌듯해했는지 모른다. 매번 긴장감을 가지고 일했지만 나는 1년이 넘도록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솔직하게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고 잘 맞는 직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매순간 감사했다.


크리스마스 주, 산타 분장을 한 델타 파일럿과 한 컷!


사실 처음부터 모든 게 나와 잘 맞던 건 아니었다. 일 시작 초반에는 소심하고 부끄러운 내 성격 탓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인터뷰를 해야하는데 목소리가 작은 건 치명적이었다. 팀장님도 나에게 '목소리를 조금만 더 키워도 될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목소리를 키우고 싶지만 이게 마음먹은 대로 쉽게 커지지가 않았다. 나에게는 적응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돌아보면, 보통 남들보다 능숙해지는 데에 항상 시간이 더 걸렸다. 전반적인 흐름과 상황 파악부터 찬찬히 해야 했다. 하지만 적응 기간이 지나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된 듯 바뀌어 있었다. 일한 지 6개월쯤 지나고 나서야  주변 선배들이 나에게 꽤 강단 있어졌다고 하면서, 처음 입사했을 때와 다르게 목소리도 커지고 저돌적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 것으로 충분히 흡수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나는 예민함과 긴장감이 높은 사람이다. 그리고 남들보다 받아들이는 게 느린 편이고,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도 긴장을 덜 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뻔뻔하게 넘어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당황할까..'


아쉬움이 섞인 말 뒤에는 항상 자책이 뒤따랐다. 나도 강해 보이고 뻔뻔해지고 싶었다. 만만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화장을 진하게 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나의 모습이 아니었고 불편했다. 그래서 나를 더 이해해보기로 했다. 내 강점에 더 집중하기로 마음을 달리 먹은 뒤부터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긴장을 한다는 것은 내가 이 일을 가볍게 여기고 있지 않고 잘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잘하고 싶다는 조급함을 조금 내려놓고 그 순간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강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단단한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받아들이면서부터 남과 비교하고 자기혐오하던 과거의 나로부터 서서히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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