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으로의 한걸음
'서비스로 해주면 안 돼?'
'사장님. 사람이 없어서 매니저 언니나 사장님 생각해서 일을 더 했는데 서비스가 어디 있어요?'
그 말을 듣는데 너무 황당했다. 다음날 출국인데, 출국 전날까지 일을 해줬는데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그 매장은 직영점이라고 해도, 본사에서 관리하는 매장이 아니라 그 브랜드 대표의 가족이라 직영점이었던 거다. 매장에는 거의 나오지도 않고, 나와 매니저 언니한테 모든 업무를 맡겼으면서 열심히 해준 직원에 대한 보답이 고작이 거라니. 이런 말들을 입 밖으로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따지듯이 얘기하니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 그냥 해본 소리야. 되게 뭐라고 하네.'
한마디 하고 전화를 탁 끊어 버렸다. 그리고 2~3시간 있다가 급여가 입금이 됐는데, 입금된 금액인 안 맞는 거였다. 다시 문자로 계산한 부분을 보내니 말없이 추가분을 보내 주었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 내야 하는 돈들이 있었다. 아주 조금 남은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야 해서 일본에 있을 때는 이체시키기도 번거로우니까 미리 돈을 넣어둬야 하고, 장기 로밍해서 가는 핸드폰 요금이나, 카드값. 그리고 그 시절 신용카드 할부금도 조금 있어서 한 달에 나가야 하는 금액이 3~40만 원은 됐다. 일단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100만 원 정도만 통장에 넣어두고, 나머지 200만 원을 들고 무작정 일본으로 향했다.
비행기도 처음 타보는데, 그 처음이 국내도 아니고 해외라니, 그리고 여행도 아니고 살러가는 거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무서웠지만 그렇게 도전할 수 있었던 용기에 감사한다. 처음에 비행기 티켓을 예매할 때 학생신분으로 하면 할인이 15% 정도 됐었어서 학생 신분으로 예매를 했다. 필요한 생필품은 일본에서 사면되는 거를 그때는 일본에 방사능 이슈도 있고 해서 전기장판부터 시작해서 생필품이나 샴푸, 위생용품, 치약, 칫솔 이런 것도 바리바리 다 싸들고 갔다. 옷이나 책 부피가 큰 것들은 미리 우체국 EMS로 미리 계약한 일본집으로 보냈다. 한 1주일 정도 입을 수 있는 것과 당장 필요한 제품들만 짐을 싼다고 했지만 배낭에, 캐리어에, 짐이 엄청났었다. 어딜 가봤어야 알지. 짐도 싸본 놈이 잘 싸는 거겠지. 최대한 절제했지만, 내 짐 싸기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해서 티켓팅을 했다. 티켓팅할 때 수하물도 같이 붙이는데, 수하물 붙이고 티켓을 받고 떨리는 마음으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안내방송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거였다. 그래서 안내데스크로 갔고, 다른 오피스로 나를 데리고 갔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불안했다. 어떤 여성분이 나와서 얘기했다.
'티켓팅할 때 학생증 확인을 못해서 학생증을 확인하려고 방송했습니다.'
'학생증은 없고, 어학원 등록증은 있는데 이걸로는 안될까요?'
'어학원은 학교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학원이라 해당이 안 되십니다.'
'어..? 그럼 국내, 국외 정식 학교 학생만 발권이 가능한 건가요?'
'네'
'그럼... 어쩌죠?...'
'알아봐 드릴게요'
내 티켓팅을 해주는 사람이 실수로 학생증을 확인을 안 했고, 그게 상급자에게 지적당해서 내가 다시 소환된 것 같았다. 순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됐다. 순탄하게 모든 걸 다 체크했다고 생각했고, 공항에서 문제가 생길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어학원도 학교라고 생각하고 바로 예매한 것이 제일 어이가 없었다. 이런 치명적인 실수라니...'지금 비행기 못 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었다. 지옥 같은 10여분이 지나고 다시 여성분이 나와서 설명해 주셨다.
'추가 금액을 지불하시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네네! 할게요!'
얼만지도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승낙했다. 결제 13만 원을 추가했다. 비행기 티켓값이 20만 원이었는데... 하지만 그 비행기를 탈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내 무지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달게 받았다. 이제 비행기를 타기 전에 출국심사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그때당시 일본에 가는 거여도 기내식을 줄 때였다. 내 옆에는 일본인이 타고 있었는데 나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나는 그냥 굳은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기내식은 새우볶음밥이었는데,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2시간이 지나니 벌써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도 처음이라 일본어로 뭘 물어보는데 내가 대답 못해서 어디론가 끌려가면 한국 대사관에 연락해야 하나... 이런 상상을 하면서 외국인 입국 심사를 받았다. 입국심사 직원들은 별 말은 안 하고 그냥 바디랭귀지로 했다. 무사히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의 엄청난 짐들과 함께 미리 계약한 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공항에서 신주쿠나 중심 쪽으로 가야 했다. 전차나 지하철도 있었는데 한방에 중심부로 가는 빠른 전철이 있었다. 짐도 많고 그냥 저거 타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예매하러 갔다. 일본 와서 처음 쓰는 일본어라 상당히 긴장했다. 머릿속에 온갖 문법과 단어들이 뒤죽박죽이었다. 분명히 나는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에도 있는 존댓말을 배웠는데 알고 있는 단어를 나열하고 반말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서 엄청난 좌절감이 들었다. 스카이라이너라는 열차였는데, 40분 만에 도쿄중심부인 신주쿠나 시부야 등으로 가는 열차였다. 못하는 일본어로 외국인 할인까지 알뜰하게 받아서 착석하고는 한숨 돌렸다.
신주쿠에서 내려 세이부신주쿠라인으로 가서 전차를 타야 하는데, 신주쿠에서 세이부신주쿠 역은 가까웠지만 어딘지 몰랐다. 캐리어에, 배낭에 손에 들고 있는 짐까지 바리바리 들고 3월의 아직 차가운 초봄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쏟으며 신주쿠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스미마셍. 세이부신주쿠 에키와 도코데스까?' (실례합니다. 세이부신주쿠 역은 어디인가요?) 그 한마디 제대로 내뱉었다고 자신감이 상승했다. '아. 세이부신주쿠 에키 데스까? @$#%^&*((^%# 데스' 그렇다. 네이티브 스피커들이 얘기하는 일본어는 처음이었다. 물어만 보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지 한참 뒤 내 정신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새벽부터 나와서 벌써 정오를 훌쩍 넘겨 2시가 되도록 아직 일본집에 도착을 못했다. 거리에서 1시간 30분 정도를 돌아다니며 배회한 결과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택시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었다. 비싸서 사람들이 택시를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 전차선과 버스노선이 너무 잘돼있기 때문에 택시를 잘 안 탄다고 했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대로 신주쿠의 미아가 되느니 택시를 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침 길가에 택시가 있어서 택시에 탑승하려고 했는데 내가 택시문을 잡고 열면서 택시 문에서 '빠각' 소리가 났다.
'아차... 일본 택시 문은 자동문이었는데...'
급한 마음에 문을 열어젖혔던 거였다. 택시기사님은 계속 괜찮다고 했지만, 문이 닫힐 때 뭔가 소리가 이상했다. 친절하게 캐리어도 실어주셔서 세이부 신주쿠 역까지 왔는데... 거리는 정말 얼마 안 되지만 내가 혼자 찾았다면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히 역에 잘 도착해서 이제 이 전차만 타면 일본집에 도착이다! 생각하고 역으로 올라갔다. 근데 중간에 플랫폼이 있고, 양쪽으로 전차가 다니는데 어디 방향인지 헷갈릴 것 같아서 2번 3번 확인하고 전차에 올랐다. 우리나라 지하철은 완행이다. 그러니까 모든 역에서 다 정차를 한다는 거다. 일본은 각행, 급행이 있었다. 전차에 오른 지 10분도 안 돼서 또 일이 생겼다. 내가 내리고자 하는 역은 각행을 타야 하는데 내가 급행을 탄 거였다. 그래서 다시 중간에 내렸다. 일본에는 다행히도 역무원이 안에 있는데 더듬더듬 물었다. '스미마셍. 히가시후시미 에키니 이키 따 인 데스케도 도 스레바 이이데스까' (죄송합니다. 히가시후시미 역으로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가 묻자 제복을 멋지게 입은 친절한 역무원은 너무 친절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며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