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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노 Dec 04. 2024

그 아름다운 설경은 다 어디로 갔나

걷다

 겨울의 삿포로에 가고 싶었다.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얀 겨울의 삿포로에 가고 싶었다. 눈 쌓인 그곳의 풍경 안에 있고 싶었다. 그런데 지난주 내가 사는 지역이 삿포로가 되었다. 첫눈 예보가 있길래 첫눈이 내리나 보다 했는데,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더니 순식간에 엄청나게 쌓였다. 전 직원 조퇴를 권고하는 분위기로, 일을 하다가 집에 갈 걱정이 들면서도 눈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온순해지는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를 놓고 퇴근하면서 눈길을 걷는데 하얀 풍경에 신나는 기분이 들었고, 좋은 기분으로 지하철 하차 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내린 폭설로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몰려 버스가 꽉 차 내가 탈 자리가 없었다. 악몽의 만원 버스다. 집에 가려면 한 시간가량 미끄러운 눈길을 걸어야 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 주의를 집중해서 하염없이 걸었다. 그냥 걷기가 아니다. 이럴 땐 미끄러지지 않기 위에 집중 안 해도 되는 평소의 걷기에 대하여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내리는 눈은 참 아름답다. 지붕 위에, 나뭇가지 위에, 자동차 위에 쌓여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풍경도 참 아름답다. 반면, 도로에 처박힌 차들과, 걷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차도 위에 긴 행렬을 하고 있는 차들의 도로 풍경은 참으로 심난하다. 당장 내가 걸어가야 하는 질퍽질퍽하기도 하고 살얼음판이기도 한, 집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 나는 미끄러운 길을 계속 걷는다. 힘겹게 걷다가 꽃집 앞 귀여운 눈오리장식이 귀여워 웃음이 나오고 내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다. 걷다가 대학교 앞 잔디밭이 넓은 설원으로 마법같이 바뀌어 있는 풍경에 잠깐 멈추고 바라본다. 좋으면 안 좋은 게 있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따라온다. 늘 좋을 수도 없고 언제나 안 좋을 수도 없다. 울다가 웃는다.

 집에 도착하고자 하는 엄청난 의지로 일단 귀가를 하고 다음 날 아침, 출근을 하려고 나섰더니 밤새 눈이 더 내려 생전 처음 보는 눈 풍경이 펼쳐졌다. 늘 생각했다. 엄청난 눈 속에 갇혀보고 싶다고. 겨울의 삿포로에 가고 싶다고. 아침의 상황이 내가 원하던 바로 그 많은 눈의 상황이다. 택시는 생각도 못하고 버스도 올 생각을 안 한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 전화통화를 하더니 버스는 오지 않을 것이니 큰길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소리친다. 원 없이 볼 수 있는 하얀 눈길을 한 시간 또 걸어서 지하철 역까지 가야 한다. 바닥은 어제저녁보다 더 심각해졌다. 걷기가 더 어렵고, 경기도의 학교들은 휴교를 고려하고, 길가에 차들은 눈에 처박혀있고, 타이어가 눈에 묻혀 멈춘 차를 밀고 있는 사람들에, 도로상황은 어제보다 더 안 좋아졌다. 출근시간이 늦춰지는 공지사항이 단톡방에 안내되고 부서원들에게 연락이 오고 나는 미끄러운 길을 계속 걷는다. 재난영화를 찍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대형 눈사람은 또 너무 아름다웠고 이른 아침에 펼쳐진 하얀 눈길은 그 깨끗함으로 장관을 펼쳐 보인다. 나는 미끄러운 길을 계속 걷는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에 더 집중해서 계속 걷는다. 기획하고 있는 어려운 사업을 앞두고 있어 7월부터 뇌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왜 이 눈길을 걸어야만 하는가부터, 뇌 한구석의 업무를 떠올리기도 하다가, 그 사업이 끝나는 파릇파릇한 봄을 맞을 수 있을까 등 생각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미끄러운 길을 계속 걷는다.  나를 보는 그를 생각하다가 기력이 점점 약해지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미끄러운 길을 계속 걷는다. 이른 아침, 이렇게 많이 쌓인 눈길을 걷기도 처음이고, 걷는 것에 집중하면서 바닥이 미끄럽다는 위험요소가 머릿속에서 뒤엉켜 굴러다니는 여러 생각들도 함께 눈길 위에 있는 듯 어지러웠다. 꾸역꾸역 걸어서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역 근처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숨을 고르는데 카페 안은 또 세상 평화롭다. 무사히 출근을 하고 다시 퇴근길은 큰 도로에 제설작업이 어느 정도 되어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제설이 되어 있는 소중한 맨 도로다. 눈과 함께 한 이틀의 여정이다.


 지난주의 일이다. 갑자기 그 눈 풍경이 다시 보고 싶어 진다. 지금은 사라진 이른 아침의 그 눈길은 어디로 간 것일까. 힘겹게 걸으며 불안한 생각들이 오갔지만 많은 양의 눈이 보여준 설경이 뇌리에 남아있다. 사라져서 더 아름다운가. 야들야들한 핑크 잎들로 꽃모양을 만들어 황홀함을 보여준 봄의 벚꽃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듯 설경도 스쳐 지났다.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다 지나가고 변하고 사라진다.

인생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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