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내일은 드디어 아빠가 병원에 가시는 날이다.
남편이 아빠를 모시고 검진을 가기로 했다. 다행히 아빠는 검사를 받으시기로 했다.
친정에서 가까운 거리의 대학병원. 아빠는 혈액, 소변 등의 기본 검사를 마치고 지하에 위치한 핵의학과를 제일 마지막으로 가셨다. 그때 나는 핵의학과가 뭔지도 모르고 현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아빠와 남편이 핵의학과로 간다는 전화에 현이를 데리고 한걸음에 그곳으로 갔다.
핵의학과는 영상검사와 검체검사를 통해 각종 암과 양성질환 등을 진단 및 치료하는 곳이다. 그중에서는 PET(양전자방출단층활영)은 각종 암의 발견과 전이여부 등을 진단할 수 있다. 아빠는 PET을 찍으러 오셨을 때 약간 지쳐 보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를 반갑게 맞이하러 갈 곳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울상을 짓고 있을 수도 없는 일.
PET을 찍기 전 대기하는 곳이 있었는데 현이가 의자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직원분이 조용히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암의 여부를 보러 온 곳에 왠 철없는 엄마와 아이인가 했을 것이다. 아! 모지리. 아무것도 모르고.
검사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도 남편도 별 다른 말이 없었다. 하긴 무슨 말이 필요할까. 결과는 다시 일주일 후에 나온단다.
"이서방이 우왕좌왕하지 않고 진료실을 차분히 잘 데리고 다녔다."
"그랬어? 다행이네. 이서방이 원래 길을 잘 찾아."
"고마워."
아빠는 옅은 미소를 지으신다.
'아빠.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해야지. 뭐든 할게.
우리 옆에 오래 있어줘.'
가족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새삼 평범함 속의 행복이 간절하게 다가온다.
항암치료, 수술 뭐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큰 병이어도 극복하고 잘 사는 사람들 있잖아. 우리 아빠도 가능하겠지?
가족과의 이별 생각해 본 적 없다.
남편은 일정이 있어 내려갔고, 나는 아빠 옆에서 현이와 있으면서 식사를 챙기고, 출근한 엄마를 기다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무더위가 가시지 않던 8월 셋째 주였다.
엄마가 출근하는 아침. 아빠가 주무신다. 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심란한 마음에 엄마를 따라나선다.
"엄마, 잠은 좀 잤어?"
"아니, 잠이 안 와. 너희 아빠 떠날 것 같아서."
"검사를 받아봐야 알지."
"일도 손에 안 잡히고, 그만두고 싶어도 다음 사람 들어올 때까지 있어줘야 하고. 너희 아빠 더 아프지 않으면 좋겠는데."
지금 상황에서 아빠가 더 아프지 않을 방법은 뭘까. 검색 내용처럼 손 쓸 수 없다는 우리 아빠의 상태를 잠재울 방법이. 생각하기 싫은데.
검진 결과가 나오는 날 언니와 형부는 아침 일찍 왔다. 오늘이면 치료의 방향이 나오는 건가? 병원 갔다 오는 길 아빠는 평소 좋아하셨던 광교 호수공원에 가고 싶다 하여 언니네가 모시고 갔다 왔다고 했다. 아빠는 그곳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싶으셨던 걸까.
아빠의 병명은 동네병원에서 나온 결과와 같았다. 위암 4기. 언니 말에 따르면 PET CT사진에 검은색이 많았는데 그게 다 암이고 이미 많이 전이된 상태라고 했단다. 아빠도 직접 보고 들으셨으니. 어찌할까. 가여운 우리 아빠.
안방으로 들어가신 아빠 옆에 언니와 내가 앉았다. 아빠는 돌아누우시더니 눈물을 쏟으셨다. 화장지를 건네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는.
언니네가 가고 오후시간 아빠와 나. 돌아다니는 현이 셋이 남았다. 그 당시 아빠가 보고 있으면 아프신 걸 잊을 정도라고 하셨던 일일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오로라공주. 전소민의 당돌한 연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으셨던 아빠는 다시 보기를 알려드리고 난 뒤 더 자주 보셨다. 아빠와 나란히 앉아 함께 드라마를 봤다. 아빠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안방 장롱에 검은 가방 알지?"
"응. 오래된 거."
"거기에 아빠 도장이랑. 통장. 집 계약서 다 있어."
" 근데 왜?"
" 알고는 있으라고."
"지금 유언하는 거야?"
아빠는 내 말에 피식 웃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