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나는 꿈을 꾸지 못했다.
'나 같은 게 설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꿈에 그리던 직업을 가지게 됐고, 멋진 집도 짓게 됐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행복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언젠가 이 짧은 행복이 금방이라도 사그라들것처럼.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왜 어때서?! 왜 꿈도 꾸지 못해? 내가 뭐가 그렇게 못났는데?"
그래서 아빠를 찾아보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절대 이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꿈.
아버지를 만나는 꿈.
단서는 많았다.
엄마와 아빠가 대학교 졸업식 때 같이 찍은 사진. 연애한 사진.
나 홀로 소송을 진행하고, 소장을 접수하고, 증거를 수집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가 연애한 사진에 찍은 날짜. 그 날짜가 엄마와 아빠가 만난 4년을 증명해 주었다.
'엄마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나의 기원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도 날 그리워하지 않았을까?라는 기대도 있지만, 그는 날 지금도 거부할 거란 현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미 한번 거부했던 사람이었기에 결말은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다시 상처받을 수밖에 없을 거란 걸 모르지 않았다.
나는 내 슬픔에 이름을 붙이지 못해 오랜 시간 정리하지 못하고 현재진행형처럼 아파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마음이 모호한 상실에서 비롯된 아픔이란 것도.
모호한 상실이란 나에게는 매우 소중한 존재의 부재를 겪는 것인데, 부재된 존재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시작된 적도, 끝난 적도 없기에 애도조차 할 수 없는 것. 실체가 없기 때문에 슬퍼할 수도, 정리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어른이니까 괜찮잖아.”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으니까 끝났어.”라고 말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였고, 상처는 늘 현재진행형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법원에서 아빠를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아빠를 찾을 수 있다는 건, 누구에게도 생부를 찾을 권리가 있고, 부녀관계는 거부할 수 없다는 것.
그동안 나는 거부당한 존재라고 명명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음속으로야 거부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만, 법적으로는 거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또한 자신의 기원을 찾는 행위는 나의 어릴 적의 구멍 난 빈틈을 찾아 무언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서사를 새로 쓰는 작업임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왜 내게 아빠의 존재를 숨기려 했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도 풀렸다.
4년 동안 연애를 했으나, 그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변했고, 배아였던 아이를 지우고 싶어 했다.
나의 엄마는 내게 그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내가 상처받을 가봐.
하지만 나의 기원 찾기는 애석하게도 현재로서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야기가 복잡해서 다음 편에 따로 해야 할 것 같다)
그를 만나면 정식으로 당신과의 나의 인연을 종결한다고 선언하고 싶었다.
종결을 원하기까지 많이 그리웠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나의 바람은 실패로 끝났지만, 나의 여정까지 실패는 않았다.
나는 아빠를 찾지 못했지만 나라는 존엄성을 찾았다. 또한 나만의 서사를 써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내가 배아였을 때 낙태를 하길 원했지만, 생각해 보면 태몽이 좋아 낳고 싶었다는 엄마, 그리고 곁에서 힘이 되어준 나의 외할머니.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나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온전히 태어났다.
나는 이 세 사람의 힘으로 생존했고,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어줬던 세 사람들 덕분에 지금 정말 훌륭하게 잘 자랐다.
이 사람들이 나의 진짜 가족이었다.
우린 때때로 기원에 대해 많은 의미 부여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이 정한 이야기 말고 나만의 해석이 들어간 나만의 서사가 중요한 것 같다.
나는 누군가에게 버려질 수 없는 존엄한 존재고, 진짜 가족은 내가 훌륭하게 자랄 것이라 믿어준 사람들이다.
그깟 기원이 나를 설명하진 못하다.
어떤 슬픔은 이름을 불일 수 없어 마음껏 슬퍼할 수 없다고 한다.
참고로 나는 내 슬픔에 이름을 붙였다. 빈자리의 슬픔.
이름 붙일 수 있어 비로소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