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소시 Oct 22. 2023

낙제 위기 과목 선생님의 상담 요청

(싱가포르 중학교 상담)

"지오그라피 선생님이 메일을 보내셨어. 상담하고 싶다 하시는데.."

아이에게 혹시 알고 있는지 물어봤더니 이미 메일을 받아 알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음.. 시험 성적이 별로 안 좋아서 상담하자고 하시는 걸까?'


막내네 학교에선 각 과목 선생님들이 매 분기마다 상담이 필요하다 싶을 때 개별적으로 학부모 상담을 요청하셨다.

싱가포르 교육과정은 각 과목마다 보통 50% 이상의 성적을 받으면 통과인데, 막내가 다니는 IP (Integrated Programme) 코스는 60% 이상의 성적을 받아야 한다. IP학교는 처음이라 많이 당황스러웠던 점 중 하나가 성적표였는데, 파일로 되어 있는 성적표의 첫 페이지에는 아이의 PSLE(Primary School Leaving Examination, 초등학교 졸업시험) 점수와 어느 나라 출신인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지난 텀에는 중국어 선생님이 상담을 요청해 오셨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의아했다. 꽤 괜찮은 성적인데 왜 상담하자 하실까 했더니 선생님이 보시기에 한국인인 막내가 '하이어 차이니즈'를 듣는 게 아무래도 무리인 거 같다며 걱정되는 마음에 연락 주신 거였다.

이 학교의 '하이어 차이니즈'반 아이들의 실력은 뉴스를 보고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토론할 수 있을 정도의 어휘와 오랄(Oral) 실력이 필요해서 중국계인 학생들도 어려워한다 하셨다. 개인 선생님이 있는지, 부모와 뉴스를 보며 여러 이슈로 토론을 하는지 궁금해하셨다. 갈수록 어려워질 텐데 아이에게 너무 부담일까 봐 아이와 부모의 의견을 궁금해하신 거였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도의 실력이 필요하다고? 어려운지는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처음엔 혹시 아이의 수준이 반 전체 수준 대비 부족하니 포기하라는 말씀인가 하고 의도를 몰라 살짝 당황했다.

식구들 중 혼자 중국어 공부하는 아이라 우리 역시 무리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조금은 안심하는 표정이셨다. 행여 부모 욕심 때문에 어려운 과정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신 걸까? 아이가 원하는 건지 확인하신 이후에야 웃으시며 그래도 진지하게 더 고민해 볼 것을 권해주셨다.


성적만을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아이의 배경을 고려해 그 어려움에 관심을 가져주신 거 같아 놀랍기도 하고 감사했다.




지오그라피는 아이가 좋아하는 과목인데 이번에 시험 성적이 별로 안 좋아서 낙제 위기라고 했다. 아마도 성적이 이러하니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려나.. 상담이 있기까지 괜히 혼나는 분위기일까 봐 마음이 무거웠다.


며칠 뒤 화상채팅으로 시작된 상담..

선생님은 활짝 웃으시면서 아이의 수업태도에 대해 먼저 말씀해 주셨다. 평소에 열심히 하는 아이인데 다른 과목 대비 성적이 조금 부족하다고.. 아이에게 이 과목을 공부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그리고 과제를 안 하는 아이가 아닌데 제때 내지 못한 과제가 있었다며 의아해하셨다.


아이가 올해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걸려서 심하게 아프면서 병원에 입원도 하고 수업 빠진 날도 많았다고 했더니 같이 안타까워해 주시면서 지금은 어떤지 걱정해 주셨다. 따로 학원이나 다른 수업을 듣느냐 물으셔서 학교 공부만 하고 있다고 했더니 수업 결손이 많아서 생긴 일인 거 같다 하셨다.


여기까지 들으시며 안타까워하시던 선생님이 들려주신 다음 이야기는 놀라웠다.

다음 시험 전에 아이가 빠진 부분에 대해 하교 후 시간에 따로 보충 수업을 진행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의견을 물어주셨다. 아이와 상의해서 가능한 시간으로 잡아보겠다고 하셨다.

세상에나.. 성적이 부진하니 개인 과외를 따로 하거나 학원에 보내 더 공부시키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본인이 시간을 내서 따로 가르쳐 주시겠다니.. 놀란 마음에 커진 눈으로 이렇게 마음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드렸다.


게다가 아이에게 공부하면서 잘 모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메일로 물어도 좋다고 하셨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물어보라고.. 배우고자 하는 학생을 위한 시간은 기꺼이 내줄 수 있다고 하셨다.

상담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 몰랐다. 아이의 상황을 헤아려주시고 도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시니 괜히 더 죄송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선생님께 고맙고 죄송해서 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거 같단다. 보여지는 아이의 성적보다 평소 수업 태도를 먼저 봐주시고 도울 방법을 찾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선생님의 마음은 감사함을 넘어서는 경이로움이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상황이 그러했을 거라 믿어주신 그 마음을.. 아이는 오래오래 감사함으로 기억할 거 같다. 선생님이 보여주신 따뜻한 헤아림으로 인해 성적 받기 어려운 부담스러운 과목이 아니라 더 알아가고 싶은 흥미로운 과목으로 남길 바라본다.


언제고 부족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받아 드는 날이 종종 있을 테다. 다 잘할 수는 없으니..

그럼에도..

조금 더 열심히 하고 싶게 만들어주는 마법.. 조금은 더 잘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마음이 아닐까..

이전 08화 학교 밴드가 에스플러네이드에서 공연한다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