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소식
조금 있다가 덜컹 문이 열리더니 좋은 인상을 가진 자는 아닌 것 같은데 2명이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김태준에게 90도 굴신 인사를 하고는 우리를 슬쩍 쳐다봤다.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가 잡고자 하는 범인들과는 먼저 눈싸움부터 시작하기에 나 역시 당당하고 거만하게 쳐다봤다.
“차형균 씨?”
“예 제가 차형균입니다.”
“우리는 대구경찰청에서 온 형사들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알고 있지요?”
“예 압니다.”
그사이 옆에 있던 김태준이
“김 형사! 이제 형균이가 왔으니 여기서 차분히 알아보면 안 되겠어요?”
“알겠습니다.”
처음 약속한 게 있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차형균 역시 도망 온다고 왔는데 이곳에까지 따라와 동네 큰 형님을 앞세우고 나타날 줄을 몰랐는지 자포자기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속으로는 “됐다.”라고 느껴졌다.
차형균은 우리에 대하여 모르지만 우리는 여기 오기 전에 차형균에 대하여 모는 자료를 확보한 상태였기에 일만의 동점심을 가지고 마음부터 접근을 했다.
“차형균 씨! 정말 안타까운 일이고 일부러 죽인 게 아닌 줄 압니다, 예전에도 분노를 못 누르고 일을 벌였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조금만 참았으면 되는데 ..”라며 범죄사실 같이 말을 해도 그냥 고개를 숙인체 듣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차형균 편이라고 생각을 하며 다정하게 조용히 조목조목 이야기를 하니 급기야 눈물을 보이기 시작을 했다.
“내 인생은 왜 이런가요? 내가 이래야만 되는가요? 누가 나를 저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가요?”울부짓던 소리를 쳤다.
옆에 있는 김태준이
“야! 형균아! 니가 그랬나?”
“....”
“아이고 자슥, 다른 일은 몰라도 사람 목숨을.. ”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니가 진짜 그랬으면 여기서 시원하게 떨어봐라. 김 형사가 도와 줄라켔으니.. 이 시점에서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김 형사 밖에 없다. 알았지?”
“....”
시간이 흘러갔지만 그대로 두었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형님!” 이라며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막상 무릎을 굻고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니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워 보였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런 행동을 했을 것으로 짐작하니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을 해봐..”
그래도 선뜻 말을 못 하고 주저하더니 태어나서부터 그동안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하는데 듣고 있는 우리도 사람인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엄격한 대한민국의 법이 있고 범죄자를 잡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형사인데 내가 모른 체하고 갈 수도 없는 입장이라 약 한 시간이 넘게 청춘의 삶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밖에 대기 중인 형사들을 오라고 하여 조용히 같이 가자고 하며 차형균을 데리고 응접실을 나왔다.
김태준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전했더니
“김 형사! 끝까지 부탁 합니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대구로 오는 길에 전화상으로 지휘부에 차형균의 검거와 자백사실을 보고했다.
“반징님!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지만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뭔데?”
“이제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연락도 안 했지만 고향에 안 가본 지도 20년이 넘었습니다. 우리 고향에 가셔서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나한테 가르쳐 주면 안 되겠습니까?”
“고향이 어딘데?”
“첩첩산중이라 요사이는 차가 들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00 시 00면 00리 00마을 인데 3개면 경계지역입니다.”
우리에게 순순히 자백을 한 인물이라 그 정도 부탁은 우리가 들어준다고 했다,
차형균은 발생지 관할 경찰서인 서부경찰서에 신병을 인계했다.
다음 날 나는 형사 1개 조를 데리고 차형균이 고향이라고 가르쳐준 곳을 찾아갔다.
00면 소재지를 지나 비포장도로를 거침없이 가는데 일반 승용차였다면 갈 수 없는 산속 외길이었다.
배 형사의 4륜구동 차가 아니었으면 중간에 돌아서 갈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가 가본다고 약속을 했으니 가야할 길이었다.
어렵게 올라간 곳에는 옛 화전민들이 살던 모습은 없고 특정 종교 집단이 들어서 있어서 사무실격인 곳을 찾아 전에 살던 주민들에 대하여 물었다.
전에 살던 주민들은 10여 년 전에 전부 도회지로 나가고 지금은 종교인들만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행방마저 모른다고 했다.
난감한 일이라 차를 돌려 면소재지로 내려와 파출소를 찾아갔다.
파출소에서 00리 주민들에 대하여 물어봤지만 1-2년 주기로 인사발령이 나는 경찰관들은 모르고 있었고 동네 나이 많은 어르신들한테 물어보라고 해서 경로당을 찾았다.
하지만 면단위에는 경로당이 없어 마을 회관으로 갔다.
면사무소 옆에 있는 마을 회관에 도착하여 00리 주민들에 대하여 물어보자 정부의 화전민 이주 정책에 따라 10여 년 전 읍 소재지로 이사 갔다고 하며 연락처를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 중 초등학교를 다닐 때 친구를 찾아 나섰다.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한들 시골에 살지 않아 또 부모를 찾아 연락처를 받아서 읍 소재지로 왔다.
읍 소재지에서 동창을 만나 차형균의 소식을 물어보니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가족들은 서울 쪽으로 갔는데 연락처를 모른다고 했다.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어 빈손으로 대구로 돌아왔다.
검찰청으로 송치되기 하루 전날 차형균을 만나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고 나서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본인이 직접 민원을 넣게 되면 경찰 전산망으로 찾을 수 있다고 전했다.
우리는 사건 수사가 아니라 마음대로 전산조회를 할 수 없어 차형균에게 안내를 했는데 그 뒤에 민원을 넣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심심산골에서 태어나 옳게 배우지 못하고, 철들면서 사고를 당해 비관을 하며 살다가 욱하는 분노를 참지 못해 사고를 쳐서 아름다워야 할 청춘을 교도소에서 보내버린 기구한 운명 앞에 누구를 원망하겠나 만은 참 안타깝다는 말 밖에 할 게 없었다.
이런 사건은 해결하고 나서도 개운치가 않아 형사들끼리 삼겹살에 소주로 마무리를 했다.
죄명은 살인으로 안 하고 폭행치사로 했는데 전과가 있어 10년 형을 받았다.
그 뒤 교도소로 면회를 가서 ‘세월이 지내면 나올 수 있으니 참고 나와서 열심히 살아라’고 하며 약간의 차입금을 넣어 주었다.
지금쯤은 출소를 하여 어딘가에서 살고 있겠지만 지난날의 아픔을 잊고 좋은 날만 계속되기를 빌어본다.
블루 칼라 범죄자들은 잘못을 아는데 화이트 칼라 범죄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나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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