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열자 아버지는 다리를 쭉 편 채 왼발을 오른발에 올리고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아버지의 낯빛은 낯설었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색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 영화에서 봤던 핏기 없는 얼굴이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그 순간에 ‘산송장’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나 자신에 거부감을 느꼈다. 아버지를 부르며 옆에 주저앉았다.
나는 긴박해져 있었다. 시선은 가슴을 향하고 손가락을 아버지의 코밑으로 가져갔다. 내 심장이 너무 쿵쾅 대서였을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였을까? 가슴의 움직임을 읽어내지 못하고, 손끝에 콧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감각이 흥분으로 요동쳐서 잘못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얼굴을 만졌다. 따뜻했다. 얼굴의 온기에 안도하며 나는 희망을 품었다. 119에 전화하는 나에게 엄마는 소용없다고 했다.
여성 대원이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숨을 안 쉬는 것 같아요"
"심장은 뛰나요?"
"잘 모르겠어요. 가슴도 안 움직이고 숨도 안 쉬는 것 같아요!"
"심폐소생술 하실 건가요?"
"네"
학교에서 회사에서 군대에서 민방위 훈련에서 수차례 해보았던 심폐소생술을 나는 아버지를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무릎을 꿇은 채 손가락을 깍지 끼고 팔이 가슴에 수직이 되게 자세를 잡았다. 아버지의 낯선 얼굴을 살피며 119 대원의 지시에 따라 흉부압박을 시작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수차례를 시행하고 대원의 지시에 따라 심박동과 호흡을 다시 확인했지만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계속된 흉부압박에 아버지의 입에서는 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입에서 거품이 올라와요!”
“네 그럴 수 있어요. 계속하세요.”
대원의 지시대로 계속 반복했지만 변화가 없었다. 마음의 바람만큼 손의 압력이 강해졌다.
'하나 둘 하나 둘'
'툭!'
순간, ‘툭’하고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갈비뼈가 내려앉는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나의 몸은 굳어버렸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어요, 변화가 있나요?”
“아니요.”
“계속하실 건가요?”
내가 도착한 시간과 지나간 시간을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다시 심장이 살아 움직일 가능성?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대원에게 대답하지 못한 채 형과 누나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막막했다. 아버지를 살려내지 못한 것만 같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나는 대답해야 했다.
“의미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나의 대답은 사망 선고가 되었고 아버지는 고인이 되었다. 남아 있는 온기를 만지며 ‘아버지’를 연신 불러댔다. 엄마는 조용히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한 달 동안 여수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다. 엄마의 팔 골절 수술로 엄마는 병원 생활을 해야 했고, 한사코 시골집에서 혼자 있겠다던 아버지를 여수로 모시고 왔다. 아버지는 그 한 달 동안 고향집을 내내 그리워했다. 엄마가 퇴원하고 팔십 중반의 거동도 편치 않은 아버지는 자신이 밥을 해서 엄마를 간호하겠다고 하며 한사코 구례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거동도 힘들고 요리도 한번 안 해본 아버지가 어찌 손도 못 쓰는 엄마를 밥 해 먹이냐고 고집부리지 말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말릴 수 없었다. 지내보고 힘들면 다시 여수로 오기로 약속하고 고향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그리고 열흘 만에 여수로도 고향집으로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다. 드라마에서처럼 자녀들이 올 때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가 자녀가 도착하면 손을 잡아주고 눈을 마주치며 따뜻한 말을 남기고 그런 건 없었다.
여수에서 떠나던 날 큰소리쳤던 나에게 아버지는
‘나는 이제 간다. 너희들에게 짐 되기 싫어서, 부담 주기 싫어서 안 버티고 간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늘 얘기했었다. 절대로 병원, 요양원 같은 곳에 들어가서 지내다 가기 싫다고, 집에서 잠자다 조용히 가고 싶다고! 아버지는 자신의 말처럼 꼭 그렇게 가셨다. 그리고 엄마는 마치 아버지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