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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든라이언 May 04. 2022

월인천강지곡에 남겨진 세종대왕의 메세지  

생명과학자의 철학

    

아마도 큰 충격이 아니었나 합니다.

집안 가족들 그리고 가족과 관련된 관료들의 숙청과 같은 검은 회오리 가운데도, 의연히 그녀를 배려하며 끝내는 가장 이상적인 왕후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모든 마음을 다했는데 병고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결국 먼저 떠나보내게 되다니.


숭유억불(崇儒抑佛,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받듦) 정책이 당연했던 시절,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한 아들 수양대군(세조) 청을 받아들여 저술케 한 '석보상절 (釋譜詳節),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 설법을 한글로 번역'을 읽고 다시 한번 그 내용에 충격과 감화를 받게 됩니다.


이에, 세종대왕 당신이 직접 찬가 583장의 시가를 지어 수록하였는데,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의 명복을 위해 저술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는 주목할만한 큰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한글을 위주로 문자로 표기하고
한자는 협주로 처리한 점


입니다.  당시, 중세의 거의 모든 한글 문헌이 한자를 큰 글자로 먼저 배치하였던 '사대주의적 관행'을 정면으로 배치한 것인데 필자는 세종대왕 당신의 '특별한 의지' 느낍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위해 물심양면 지극정성을 다해 완성한 이 책만큼은 한글을 앞에 두는 과감함으로 시대적 상황에 타협하지 않고 속국이 아닌 자주적인 국가의 위상에 대한, 일종의 '자주국가에 대한 의지의 표명'을 훗날 후손들을 위해 남긴 분명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당시 사대부들은 이런 파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명분이 있는 만큼 반대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이 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월인천강(月印千江)'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비춘다는' 뜻으로, 책 앞부분에 ‘부처가 백억 세계에 화신(化身)하여 교화하심이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라는 주석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청정하며 밝은 성품을 완성한 부처님이 여러 세계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고통받는 존재들이 스스로 완전한 존재였음을 깨달아 '불매인과(不昧因果, 인과에 매이지 않는)' 증득(證得, 노력을 통해 성취)하여 대자유(大自由)에 이르도록 돕는 모습을 세상의 여러 강을 차별 없이 골고루 비추는 밝은 달로 표현한 것은 탁월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모진 삶의 풍파에서도 의연함을 갖추었던 소헌왕후의 영혼이 비치는 밝은 달빛을 따라 더 나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지기도 하며, 어느 곳에 있든 밝은 빛이 되어 비춰주겠다는 세종대왕의 단심(丹心)이 부처님의 시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자비행을  비유 표현한 저서의 제목을 통해 중의적인 함의(含意) 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세종대왕에 명에 의해 진행된 전 언해는 1447년 석보상절을 시작으로 월인석보, 금강경, 반야심경, 능엄경 등 20여 종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용비어천가와 의학서적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한글화 자료가 '경전'이었습니다. 이는 세종대왕의 집권 초기의 숭유억불 정책과 크게 상반되는 점인데,  집권 초기에는 불교를 이단(異端)으로 여겨 억압정책을 시행하면서, 7종(宗)이던 불교교단을 선·교의 양종으로 통폐합시키고, 전국에 36개 사찰과 3,770명의 승려만을 남게 하는 등 오히려 부왕인 태종보다 더 심한 '억불'을 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던 분이 집권 후기 많은 신하들이 반대 상소와 사직서를 내며 반대했던 내불당을 창덕궁에 기어코 건립했던  깊은 뜻이 무엇이었을까 무척 궁금한 대목입니다. 


필자가 관련된 여러 글들을 조사해보니 세종대왕이

왕후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한 개인적인 종교적인 욕구, 불교적 구원(救援)이나 기복(祈福)으로의 개인적 신앙의 발로라든지, 성리학자와 사대부들의 특권의식에 대한 저항이라는 해석 등이 있었는데, 필자는 세종대왕의 철학적 깊이를 가늠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단순히 외양적인 측면에서만 해석되어 다소 폄하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과학을 지탱하는 큰 두 축은 '발견'과 '발명'입니다. 위대한 발명은 문제의 핵심을 '발견'하는 날카로운 안목과 그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없인 탄생할 수 없고 그 지혜를 갖추는 데엔 '남다른 깊이 있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발명을 완성하고자 하는 심지(心志)는 깊은 고뇌와 자아성찰을 통해 갖춰진 '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일단, 학구열이 남달랐던 세종대왕이 스스로 접한 서적들을 통해 불교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첫째 형님인 양녕대군이 폐세자 된 이후 비극을 피하고자 불교에 일찌감치 귀의  둘째 형님 효령대군의 배려로 인해 셋째로 태어났에도 평화롭게 제위 하며 더욱 불교에 호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실제로 제위기간 동안 효령대군이 법화경과 금강경의 언해와 발행  및 원각사 창건 등 불사를 주도하는 것을 후원하였습니다.)


이후, 제위 중반까지 육식과 비만 당뇨를 통한 건강의 악화 등 결국 국정을 이어갈 수 없어 대리청정을 하게 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생로병사를 거치고야 마는 인생에 대한 철학적 고뇌가 소헌왕후와의 이별로 인해 극대화된 후 석보상절에 서술된 부처님의 생애와 설법에 크게 감동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세종대왕의 불교이해에 대한 깊이를 함부로 가늠할 수 없지만, 필자의 주관적 소견으로 당신은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에 기반한 '자리이타(自利利他), 나와 다른 존재를 함께 이롭게 한다'행을 지극히 추구하였다고 추측합니다. 특히 유교적 사대주의 사상에 의해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백성들의  신분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당시의 불평등한 계급제도에 대해 당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차별 없는 인재 등용과 파격적인 지원을 통해



파사현정(破邪顯正, 그릇됨이 깨어지는 순간 바른 것은 저절로 드러난다)



에 대한 실천을 하나씩 해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노비는 비록 천민이라고는 하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 신하 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 된 자의 덕(德)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 지도 않고 그 주인을 추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1444년) 기록만 하더라도 차별적 계급제도에 의해 무고한 고통을 받는 노비에 대한 지극한 배려는 선민사상(選民思想, 우월의식에서 약자를 차별적 동정하는)이 아닌 '하늘이 낸 백성'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으로서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춘 절대 평등한 존재라는 기본적인 철학에 바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뿐만 아니라 과학, 의학, 문화, 예술, 법 및 국방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진일보시켰던  위대한 과학자인 세종대왕이 소중하게 받들며 추구했던 그 '철학'의 깊이에 대해 '직시(直視)'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단순히 그분이 남긴 유물론적 유산만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향유하며  자랑스러워했던 시간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건국이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세종대왕의 철학.

이제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존재로 그 깊이와 넓이를

확장할 수 있는


'달빛 같은 스승'


들이 많이 나타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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