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태어나고 여러 해 동안 따뜻한 겨울이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좋아하던 마을 사람들은 겨울에도 죽지 않는 세균과 벌레, 겨울잠을 자지 않는 동물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마을에는 수시로 역병이 돌았다. 관아에는 하루에 수십 번 동물들의 피습으로 민원이 들어왔고 임금은 곳곳에서 발생하는 재해 때문에 수심이 깊어졌다. 그 와중에도 선은 무럭무럭 자랐고 다행히 월영이 걱정하던 피의 복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선이 태어나던 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이 모든 일은 선 때문이라고 믿었다. 특히 선이 하는 기괴한 행동은 사람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선은 시신을 살펴보는 것을 좋아했고 동물들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작은 동물의 목을 잘라 죽이기도 했다. 선 때문에 겨울은 더 따뜻해지고 농사는 흉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도민의 집을 찾아와 선을 내치라고 소리를 지르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때마다 도민은 사람들을 말리고 선을 지키려 했지만 선이 태어나던 날 만난 피범벅이었던 아이가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건 본인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선이 10살이 되던 어느 해, 도민은 선을 불러서 말했다.
“선아. 내가 나이가 많아서 너를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기는 위험하니 당분간 절에 머무르면서 스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어떻겠니?”
도민은 선이 스님들과 불도를 익히다 보면 악한 마음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린 것이라고 믿었다. 선도 그러겠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선의 출가가 결정되던 날부터 월영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역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민도 역병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은 그런 어미와 아비를 두고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훗날 집안에 큰 불이 나서 부모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선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선이 절에 맡겨지기 몇 년 전, 무당은 주지 스님을 찾아가 10살이 된 사내아이가 절에 맡겨지면 절에서만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한 적이 있었다. 후에 나라에 큰 해가 될 테니 속세와의 인연을 끊게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 절에는 송연이라는 아이도 있었는데 선처럼 어린 시절 절에 맡겨져 심부름하며 지내는 아이였다. 스님도 이 둘에게 절 밖은 위험하니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자주 타일렀었다. 그래서인지 둘은 서로만을 의지하며 애틋하게 자랐다.
어느덧 송연은 16살이 되었고 송연의 부모는 좋은 혼처가 있으며 혼사의 대가로 꽤 많은 돈을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송연은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먼저 가. 금방 따라갈게.” 선이 송연에게 말했다.
“진짜 올 거야?” 송연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럼.”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선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금세 마을로 퍼졌다. 사라진 겨울보다, 사라지지 않은 역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선의 귀환이다. 사람들은 선이 태어나던 날 피범벅이던 사내아이를 기억하고 있었고 죽은 선의 부모와 타버린 집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선의 귀환으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은 당연다.
“그 자식을 죽여야 해.”
“자기 아비어미 죽이고 살아남은 아이야.”
두려움에 떨던 마을의 장성들은 삼삼오오 모여 선을 죽일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아낙네들도 방안에 아이들을 꼭꼭 숨기기 바빴다. 그리 어수선한 날 정말로 선이 마을로 돌아왔다.
선은 마을에 돌아오자마자 무당을 찾아갔다. 그곳은 절을 떠나기 전 피를 흘리던 아이가 알려준 곳이다. 선이 피를 흘리는 아이를 처음 본 것은 절에 들어온 저녁이었다. 아이는 자기 얘기를 길게 하지 않았고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죽음에서 건져 올려졌고 언젠가 선과 함께 세상 속으로 가서 사람들의 마지막을 보고 싶다고만 했다. 자신은 지옥의 신이자 하늘의 선녀로 세상을 태워 처음으로 만드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말도 했었다. 그 아이는 선에게 무당이 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으니 찾아가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 자주 일러주었다.
“무엇이 알고 싶은 거냐?” 선을 보고 무당이 먼저 물었다.
“나는 무엇인가?” 선은 다짜고짜 물었다.
“그건 네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무당은 되물었다.
“나는 저주받은 아이인가?”
“자네는 사신이야. 세상을 생지옥으로 만들 사신.” 무당은 킥킥거렸다.
“예전에 자네의 어미에게 자식을 가질 수 있는 방도를 알려주었지. 목이 없는 짐승을 태워 갓 죽은 아이와 제를 지내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지만 죽은 아이를 구할 수 없었던 네 어미는 자네 아비 첩의 자식을 죽여 제를 지냈어. 그러니 죽은 아이와 그 어미의 한이 사신을 탄생시킨 거야.”
“솔직히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내가 진짜 궁금한 것은 내가 왜 그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너는 첩년의 아이를 새타니로 만들고 대신 태어났어. 그러니 네가 막았던 길을 다시 열어줘야 할 운명은 피할 수가 없다. 아이를 죽여 제를 지내고 다시 태어난 아이는 반드시 지옥 속의 지옥. 다시는 태어나지 못할 절대 악만이 존재하는 곳. 그곳의 사신으로 되어야 해. 그건 피할 수 없는 너의 운명이다.” 그순간, 선은 송연이 생각이 났다.
“그 계집이 보고 싶으냐?” 무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송연을 아는가?” 선은 짐짓 놀랐다.
“알지, 그 아이는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가 절에 버린 아이야.”
“그걸 어찌 아는가?” 무당을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계집이 태어나던 해에 어쩐 일인지 자식이 없는 부부가 참 많았어. 그 아이의 어미도 한참 동안 자식이 없었지. 용하다는 무당이 징표를 지니고 있으면 사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에 없는 살림에 부적을 사서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그 징표가 효험이 없었는지 계집아이가 태어나버렸지 뭐야. 그 후로 그 아이의 운명이 짐작되지 않은가? 말 그대도 구박덩이였어. 아마 그 무렵인가 봐. 송연인 그 새타니를 만난 것이.” 무당은 갑자기 정색하며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여기에 온 이유를 알고 있네. 송연이는 이 씨의 첩이 되지 않아. 그 집안은 오늘을 끝으로 모든 것이 사라질 걸세.”
선은 아무 말도 없이 무당을 보았다. 추한 노인네이지만 눈빛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왜 내 어미에게 아이를 낳을 방법을 알려준 건가? 죽은 아이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이제야 묻는 건가? 내가 누구인지 이제서야 궁금한 것이야?” 무당은 계속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네가 세상에 태어나도록 길을 열어주는 또 다른 사신이지.” 무당을 계속 낄낄거렸다.
“나도 네 어미에게 알려주기 싫었어. 세상이 불타는 건 바라지 않았거든. 근데 어쩌겠나.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나는 네 어미에게 운명을 피할 방법도 알려줬어. 하지만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어. 결국, 운명이라는 것은 마음대로는 안되더라고. 그 중놈한테도 너를 세상으로 보내지 말라고 그리 일렀는데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을 보게나. 운명을 어쩌겠는가?”
“송연도 운명의 한 부분인가?” 선은 처음으로 무당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 계집은 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지옥과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가 만들어질 것이야. 그 길을 따라 새타니가 어른이 되면 세상은 살아있는 흑승지옥(黑繩地獄)이 되는 것이다.” 무당은 숨이 넘어갈 듯 낄낄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려 하자 무당이 웃음을 멈추고 조용히 말했다.
“기억해라. 그 피 흘리던 새타니의 이름도 선이다.”
송연의 혼례식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기 바빴고 신랑인 이 씨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집안의 어른들은 이 씨를 둘러싸고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고 송연은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송연의 옆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아?” 아이가 송연에게 말했다.
그 순간, 선이 혼례식장으로 들어섰다. 송연은 선과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올 줄 알았어.”
“온다고 했잖아.” 선도 조용히 대답했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해?” 송연이 물었다.
“글쎄, 근데 송연아. 너는 이 아이 알아?” 선은 대답 대신 사내아이를 가리키며 덤덤하게 물었다.
“응. 예전부터 자주 나를 찾아와 너의 얘기를 들려줬어.”
“이 아이가 지옥에서 온 것도 알아?” 선이 물음에 송연은 놀라지 않았다.
“알아.”
“송연아. 근데 왜 이 아이랑 함께 있어?”
“나는 악마도 상관없어. 이 아이가 너와 나를 하나로 만들어 줄 거야. 나는 너랑 있으면 지옥이라고 좋아. 그리고 어차피 세상은 지금도 지옥이잖아.” 송연의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왠지 선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