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내가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을 보고 끄적여본 코멘트이자 알베르 카뮈가 던진 중대한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게 되면, 무의미한 세계에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 즉 당신의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셈이다. 냉정하게 말해 딱히 살아갈 이유가 없다면 어차피 죽을 거, 나중에 죽으나 당장 죽으나 상관이 없다. 지금 자살해도 아무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죽고 싶어지는 영화가 몇 있는데, ‘토리노의 말’이 그중 하나다. 주인공 남자의 존재는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며,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무의미하게 반복된다. 자살을 고민하면서도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두려움 때문일까, 삶에 대한 의지일까. 짐 자무쉬의 ‘패터슨’과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가 ‘희망편’이라면, ‘토리노의 말’은 ‘절망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싶다.
도대체 왜 이런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려 하는가? 존재의 허무를 겪으면서도 끝끝내 삶을 이어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의문이 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남자의 삶의 의지는 끈질기게 보인다. 절망 속에서 무엇을 붙잡고자 하는 의지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고자 하는 의지인가. 이렇게 보니 완전 절망적인 영화는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 전체에 묻어 있는 허무주의는 벨라 타르만의 독보적 스타일과 잘 어우러진다. 매우 느린 카메라 이동과 극단적 롱테이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다. 실존적 위기에 처한 인물의 무기력함과 공허감의 리듬을 전달하기에 최적화된 형식이다.
+)이건 웃자고 하는 이야기인데, ‘패터슨’(틈틈이 시를 쓰는 패터슨)과 ‘퍼펙트 데이즈’(책을 읽고 나무의 사진을 찍는 히라야마)의 주인공들은 일상에 취미와 예술이 들어있는 반면, ‘토리노의 말’의 주인공은 그렇지 않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