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열기가 봄을 밀어내고 자기 자리인 양 계절을 차지한다. 봄은 아직 계절을 떠나보낼 수 없는지 산산한 바람을 뱉어내는 6월 초. 자전거를 타기 딱 좋은 날씨다.
서울 야경도 구경할 겸, 여의도 한강공원을 가보기로 한다. 내 집에선 코앞이다. 영등포와 여의도를 잇는 다리를 건너면 횡단보도가 있다. 그 앞엔 여의도 공원이 거대하게 자리해 있다. 매번 이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걸릴 때면, 나는 내가 건너온 다리 쪽으로 몸을 돌려 멍하니 풍경을 안경 낀 눈으로 담는다. 다리 양 옆 끝트머리에 일렬로 정렬한 가로등과 다리를 건너는 수많은 자동차들을 보다가 마치 최면에 빠진 듯 멍해지다 보면, 매번 초록불 신호를 한 두 번 놓치다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오늘도 어김없이 다리의 풍경을 무심코 바라보다 가로등 조명 덕에 안경알에 먼지가 잔뜩 낀 것을 알아챈다. 안경을 벗고, 대충 옷에다가 먼지를 닦아낸다. 다시 고쳐 쓰려고 고개를 들어 눈을 뜬 순간, 내 눈으로 들어온 것은 언제나 내가 보던 다리 주변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세계로의 모습이다.
일렬로 마주 보며 차가운 빛을 내던 가로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알록달록 별들이 행진하고 있다. 굉음과 함께 요란한 빛을 뿜어내는 자동차는 없고 울긋불긋한 별똥별이 스쳐간다. 쓰려던 안경을 잠시 내려놓고 내 주변의 풍경을 내 본연의 눈에 담는다. 휴일 저녁인데도 켜져 있는 사무실의 전등, 정해진 규칙에 맞춰서 빨강, 노랑, 초록 불빛을 바꿔가는 신호등. 각자의 사연이 담긴 서울의 불빛들은 원초적인 원형으로 자태를 바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사한다.
찰나의 순간동안 바라본 이계의 별들. 내가 본 그 어느 별들보다 가까웠고 다채로웠고 입체적이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존재였고 자신들만의 빛을 뿜어내며 내 마음의 초점을 흔들어댄다.
나는 이내 안경을 쓴다. 시력이 좋지 못해 생긴 매우 과학적이고 의학적이며 당연한 현상일 뿐이라며 자신을 타이르고 횡단보도를 걷는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 공원에 도착해서 한강 다리에 다다른다. 역시나 사람은 바글바글. 지금이 한강에 오기 딱 좋은 날씨라는 것은 나 말고도 서울의 모든 사람은 안다. 한강의 잔잔한 물줄기가 잘 보이는 적당한 자리를 찾기 위해 강가 근처로 내려갈 즈음, 난 또 한 번 느끼고 싶었다. 너무 기대하면 실망도 클까 싶어 괜한 기대감 없이 안경을 벗는다 (물론, 내 마음속 어딘가 한 구석에는 다시금 몇 분 전의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그득하지만).
아까와는 또 다른 세계. 한강의 물줄기는 은하수였고, 마포대교 위 가로등은 수십 개의 달이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허공을 배회하는 아지랑이였다. 알고 있다. 내 눈앞에는 그저 6월 한강 공원의 일상이 놓여져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지금 담고 있는 것은 서울이라는 현실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앞에놓인 광경을, 초점 잃은 광경을 한동안 묵묵히 눈에 담아 본다.
내 눈은 중학교 이후로 혼자서는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없었다. 더 명확하게, 더 또렷하게, 더 선명하게, 더 면밀하게, 더 섬세하게 세상을 알아가기 위해 안경을 썼다. 하지만 안경을 쓴 이후로 내가 목격하는 세상이 더욱 명징해지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을까. 욕심이 커질수록 또렷해지는 것 하나, 서울은 꽤나 어둡고 텁텁하며, 차가운 불빛들이 만연해 있는 도시라는 사실이었다.
오늘 밤, 내가 안경을 들추고 본 밤은 서울의 밤이다. 그저 서울이다. 그러나 온전한 내 눈이 목도한 오늘의 서울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깨끗하고 맑았으며 따뜻했다. 사진으로는 결코 온전히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기록물로 간직할 수도 없다. 여태껏 수 없이 안경을 벗고 밤풍경을 마주해도 열리지 않았던 세계. 그 찰나를 글로 표현해 본들 다른 이들에게 와닿을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 내 글의 미학적 한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그 찰나가 만들어낸 몽환적인 모습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이기에.
서울에 사는 이들에게 어쩌면 안경은 필요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력이 너무나 좋은 두 눈이 오히려 서울 본연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훼방 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