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기억들
비가 온다는 소식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비가 내린다. 비가 땅에 닿는 소기가 귀를 울리고, 풀잎에 떨어지는 비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잎을 적신다. 미쳐 풀잎에 닿지 못하고 그 사이로 떨어져 버린 비는 흙을 일으켜 내 코끝까지 와 있다. 화분으로 가득한 작은 정원이 보인다. 발길이 저절로 가게 앞으로 향해 가는 기분이다. 너무 늦게 온 걸까? 불은 이미 꺼져있고 문은 닫혀 있다. 아쉬움이 가득한 두 다리는 닫혀 있는 문 앞을 한동안 떠날 수 없었다. 불 꺼진 어둠 사이로 작은 꽃들이 보인다.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는 여름이 되면 생각나는 꽃이 있다. “오늘이 로즈데이래.” 하며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던 사람이 있었다. “장미꽃 꽃 말이 사랑 이래. 몰랐지? 꽃다발 사려다가 네가 장미꽃 싫어해서 한 송이만 샀어.” 하며 꽃 보다 더 환한 미소와 함께 건넨 꽃 한 송이를 받으며, 나는 장미처럼 탐스러운 미소로 화답했었다.
온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듯한 비가 오던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내가 마음을 다 전하기도 전에 꽃잎이 다 떨어져 어떠한 온기도 남아있지 않아 다 시들어버린 꽃처럼 내 옆자리를 남겨두고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어떤 인사도 없이. 내가 어떠한 노력을 해도 만날 수 없는 멀고 먼 곳으로 영원히 떠나가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쏟아지는 비와 함께 울고 또 우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저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꽃집을 갈 때면 장미꽃을 보며 그날을 떠올리곤 했었다. 세상 어떤 장미도 수줍게 웃으며 전하던 그날의 장미만큼 붉고 아름다운 꽃은 없었다. 장미꽃은 아프고도 사랑스럽다. 오늘은 그날처럼 아름다운 장미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날이다. 하지만 이미 닫혀버린 문이 오늘따라 더 야속하기만 하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 다시 들러 가게 앞에 놓인 많은 화분도 찬찬히 둘러보고 정원처럼 예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다른 꽃들도 보고 싶다. 다시 오게 되면 꼭 장미꽃을 사 가야지.
목구멍이 타는듯하다. 뜨거운 것이 흐리기 전에 뒤돌아서서 오늘은 마음으로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건네 본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