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필요한 건 복수가 아니라 복원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봄이었다. 내가 그 시기를 그나마 그 정도까지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일종의 나만의 복수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버지와 살았던 여자의 이름은 모른다. 어느 날은 나에게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다가 어느 날은 나에게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 집에 들어와서 살고 싶었지만 할머니가 눈치를 이만저만 주는 게 아니었는지 들락날락했다.
집에 찾아오는 모든 여자들은 죄다 엄마를 나가게 만든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리고 가난한 데다 돈을 주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난 그 무엇이든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넘쳤다. 단 한 번도 친구들과 함께 뭔가를 할 때, 난 돈을 낸 적이 없었다. 그 조그만 11살짜리 꼬마에게도 그런 자존심은 허락하기 싫었나 보다.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만의 복수는 바로 그 모든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적용된 결과였다. 때마침 숨어들었던 이불장 속에 낯선 핸드백이 보였다. 바로 그 여자의 것이었다. 호기심에 열고 들춰보았다. 처음부터 훔칠 생각으로 열어 본 것은 아니었다. 정말 진심으로 호기심에 열어봤다. 그 안에 지갑이 있었고 어린 내가 보기엔 정말 많은 지폐가 들어 있었다. 역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던가. 결핍 중의 결핍이었던 돈을 보자마자 그저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저렇게 많은데 몇 개 없어져도 모르겠지?'
정녕 몰랐을까? 어찌 되었든 난 그렇게 몇만 원 - 대략 2-3만 원 - 을 몰래 훔쳐서 나만의 유흥(?)을 즐겼다. 갖고 싶었던 게임기도 사고 친구에게 폼나게 돈가스도 사줬다.
그냥 엄마가 아닌 어떤 여자여서 그랬을까? 물론 그 정도 이유만으로도 난 충분하게 뭔가 복수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날 화나게 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 방에서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거의 대부분 늦게 오기 때문에 할머니와 나와 동생이 주로 자는 할머니 방보다 좀 더 넓은 아버지 방에서 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난 종종 그 방에서 잤다. 그렇게 잠들고 한참 지났나 보다. 옆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난 잠이 깼다.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고 눈곱이 끼어서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있었지만 그 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내가 자고 있는 바로 옆에서 아버지와 그 여자는 벌거벗은 채로 몸을 뒤엉키고 있었다. 11살짜리 아이가 난생처음 실제로 보는 섹스 장면이었다.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옆에 아이가 자고 있어도 그와 상관없이 불을 켜놨으며, 옆에 그렇게 아이가 자고 있음에도 좋아 죽겠다는 신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섹스는 그 자체로 충분하게 아름답다. 아마도 남자와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치의 행동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날 내가 본 장면은 충분하게 넘치도록 역겨웠다. 조강지처에겐 걸핏하면 임신한다면서 정관수술을 해버렸던 인간이었다. 그냥 밖에다 사정해 버리면 될 것을, 자기 욕구를 마음껏 채워보겠다며 그렇게 수술을 해버렸다. 그래서 더 걸림돌이 없어진 걸까? 생물학적인 걸림돌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걸림돌도 없어진 걸까? 그래서 옆에서 아들이 자고 있어도 상관없이 그런 행동을 벌인 것일까?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비슷한 케이스가 등장한다. 그림을 너무 잘 그리는 남성 환자가 유독 성기 그림만 집착하면서 그린다. 그것도 너무나도 디테일하게 말이다.
"얼굴은 작고 팔다리는 짧게, 성기는 정말 크게 그려. 이상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의사 지해수(공효진)의 말에 남자 친구인 장재열(조인성)은
"성기 그리는 게 뭐가 나쁘냐, 그림인데.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라고 말을 툭 던졌다.
여기서 답을 얻은 지해수는 환자를 만나서 이렇게 말한다.
"자세히 보니까 너 그림 잘 그린다. 화가 해도 되겠는데? 나 사과할게. 네 사정도 있을 건데,
너도 힘들었을 건데, 미안해."
라고 용서를 구한다. 지해수의 그 행동에 그 환자는 마음을 연다.
"엄마가 애인이랑 옆방에서 자는 걸 봤다. 엄마가 날 버리고 떠날 것 같아서, 그게 두려워서"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놨다. 치료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난 그 드라마를 두 번 봤다. 드라마에서 다루었던 거의 대부분의 케이스들이 내가 경험한 것들이어서 힘들었다. 문제의 그 장면은 또 봐도 마음이 아리다.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도 하지만 환자를 통해서 의사가 위로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상처를 받고 힘든 시간을 보낸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치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난 엄마의 빈자리에 불쑥 찾아온 여자에게 뭔가 해코지를 하고 싶었다. 돈을 훔치면 복수가 될 듯싶었다. 그러나 나만의 소심한 복수는 복수가 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좀도둑이 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되었다. 진짜 복수는 무엇일까? 복수라는 것에 관심을 끊는 것이다.
내 삶에 필요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복원이다.
말도 안 되는 환경과 경험 때문에 무너진 내 마음과 일상과 생각들이 건강하게 돌아오는 것이 진짜 필요한 것이다. 분노를 풀고 쏟아내고 뭔가 상대방에게 어떤 것을 돌려줘야 정의롭고 뭔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그렇게 하면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속이 풀리는 것? 정말 속이 풀릴까? 가만 돌아보라. 속이 풀렸나? 아니, 그냥 시간이 흘러서 조금 가라앉은 것뿐이다. 시간이 흘러서 그랬다는 건 그 순간 분노하든 분노하지 않든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의미다.
내 삶에 결핍을 준 어떤 사람과 환경을 향해 원망, 불평, 분노를 쏟아내도 내 삶이 바뀌지 않는다. 그냥 그저 그런 내 삶에 원망, 불평, 분노만 추가될 뿐이다. 내 삶이 바뀌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람과 환경도 전혀 바뀌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거나 망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환경이 폭망 하듯 바뀌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내 모습과 내 삶을 바라보자.
다시 강조하고 싶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