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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헤다 Oct 11. 2022

엄마가 아니라 여자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끔찍하게 사랑하는 딸이었다

 엄마가 집을 나가서 헤어진 후 25년이 지나서 난 다시 엄마를 만났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었지만 결혼을 앞둔 성인이 되면서 용기가 났다.  

 그렇게 오랜만의 만남을 시작으로 엄마를 종종 만나기 시작했다. 명절에도 만나고, 엄마 생일에도 만나고, 어느 순간부터 엄마와 재혼한 남자에게 그냥 아버지라고 불렀다. 내 아버지가 아버지 같지 않아서 어쩌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옆에 있는 사람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딸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내가 아저씨라고 하는 것도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서 너무 좋았다. 잃어버린 가족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삶의 변화이고 축복이다. 그렇게 만남을 가진 지 몇 년이 흐르고, 내 마음에 작은 변화가 한차례 찾아왔다. 바로 첫째 아이가 8살이 되던 해였다. 엄마가 나를 놔두고 집을 나갔을 때, 내가 8살 때였다. 잊을 수가 없는 날이다. 엄마라는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이든 이해든 겪어보지 않고서는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25년 만에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이 치솟은 건 바로 그때였다. 계속 만남을 하면서도 전혀 올라오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그러다가 내 딸이 8살이 되면서 감정이입이 된 셈이다.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입장으로서 자기 자식을 놔두고 떠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딸이 8살이 되기 전에는 전혀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 눈앞에 여전히 작고 여린 꼬마 아이를 보면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똑같이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더 슬퍼졌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딸을 놔두고 어딘가로 떠날 수 없어.'


 내 마음속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버리고 떠나버릴 수가 있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25년 만에 만난 기다림과 애틋함은 그 순간 싹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다시 만나고 소통하면서 엄마는 내게 연신 미안했다고 말을 했고 그 말에 나는 늘 괜찮다는 말을 엄마에게 했다. 그래 왔던 관계에서 순식간에 다시 얼굴색을 바꾸면서 왜 그랬냐고 따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의 불편한 마음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매일 전화하다가 주 단위로 바뀌고, 한주 한 번에서 한 달에 한 번으로, 그러다가 어쩌다 한번 전화하는 것으로 줄어들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달려가서 같이 식사하고 시간을 보냈지만 만남의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저 25년 만의 극적인 만남이어서 마냥 좋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기만 했는데, 마냥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참 내 마음속도 인간성도 그다지 별로였다.

 그렇게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은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자라났다. 심지어 날 버리고 나가서 잘 살아왔다는 것도 싫었다. 난 지옥 속에서 살았는데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도 더 분노스러웠다. 다시 생각하면서 울었고, 또 울면서 그 생각을 했다. 지옥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나 싶었는데 다시 지옥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을까? 딸아이가 날 꼭 끌어안더니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여전히 아이를 보면서 난 생각했다. 


 '이런 사랑스러운 자기 자식을 어떻게 놔두고 떠나버릴 수 있을까?'


 그런데 그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올랐다. 


 '만약 내 딸이 엄마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면?'


 내 엄마와 같이 내 딸도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과연 난 어떨까? 내 딸이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매일같이 때리는 남자였고, 여러 여자들을 만나면서 외도를 일삼는 그런 남자라면 말이다. 내 품 안에서 예쁘게 잠들어 있는 내 딸이 그런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면 과연 난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이전의 분노와는 차원이 다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새끼 내가 가만 안 둬. 쫓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아주.'


 그랬다. 내 딸이 그렇게 되면 아마도 난 미쳐 돌아버릴 거다. 가서 반쯤 죽여놓을 거다. 아니 진짜로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이혼을 시킬 거다. 그런 놈과 결혼을 허락한 나 자신을 저주할 것이고 주변 사람들이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난 분노했을 것이다. 


'아 어쩌면 엄마는 진즉에 집을 나갔어야 했구나. 더 빨리 나가지, 왜 내가 8살이 되어서야 나갔을까?'


 사실 엄마는 그나마 버티고 또 버틴 것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버틴 것이었다. 젖을 뗄 때까지 버텨야 했고, 똥오줌 가릴 정도까지 버텨야 했고, 그러고 나면 밥을 혼자 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라도 버텨야 했다.  


 내 생각은 그렇게 바뀌었다. '어떻게 자식을 버릴 수 있지?'에서 '오죽하면 자식까지 두고 나갔을까?'

 그게 더 맞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나도 내 자식을 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의 가치인데, 그것을 포기할 정도면 얼마나 힘들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도 그 이후에 나름대로 부족하지 않게 행복을 찾아가면서 살아온 엄마에게 고맙고 다행이다 싶었다. 다시 만난 엄마가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었다면 아마 난 더 괴롭지 않았을까?

 내 기준과 내 입장에서는 엄마였지만, 22살에 시집와서 아이를 낳고, 남편이 때리고 외도하는 것을 그냥 힘없이 지켜보고 버티다가 31살이 되어서야 집을 나간 것이다. 31살의 여자는 지금 내가 생각해도 여전히 어리다. 그리고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고, 행복할 권리가 있는 31살의 여성이다. 내 엄마지만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도 있고, 사랑을 누릴 자격도 있고, 매를 맞으면 안 되는 것이고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그런 소중한 존재였다. 어떤 사람의 아내라고 함부로 해서도 안되고, 어떤 아이의 엄마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참아내며 견뎌야 하는 것이 의무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끔찍하게 사랑하는 딸이었다. 내가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때로는 분노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씁쓸해하고, 엄마에 대해서 이런저런 마음의 파도와 태풍이 지나가고 나서 난 엄마를 더 이해하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냥 고마웠다. 그렇게 또 잘 살아내줘서 고마웠고, 한 사람의, 한 여자의 인생으로 그 순간 끝나지 않고 다른 발걸음으로 새롭게 이어가줘서 고마웠다. 그래서 25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 다시 날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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