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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88호 면 14화

[오아시스] 그러면 어쩌면 아니면

청완

by 상경논총

*본 글은 지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픽션임을 밝히며 이 글을 완성하는데 큰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별에 닿고 싶었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이가 지나서도 여전히 별에 닿고 싶었다. 거창한 소원에 비해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어릴적 부모님과 산에 올라 바라본 우주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해서. 그 순간부터 나는 별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무언가를 공부한다면 그 대상이 우주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꽤나 구체적이었다. 너를 만났던 건 나름대로 그 길을 잘 찾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날들 중 하루였다. 그날은 꽤 추웠던 것 말고는 특별할 것 없던 보통의 어느 날이었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 늦지 않게 학교에 갔고, 추운 날씨에 교복 바지 말고 치마를 입고 온 걸 후회하기도 했고, 친구들과 떠들며 점심을 먹었고, 내년 수능을 대비해 시작한 야자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했고, 환하게 보이는 달을 보며 집에 갔던 평범한 날이었다. 집 방향이 비슷한 친구들과 헤어지고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유난히 예뻤고 별이 이상하리만큼 많이 떠 있었다. 계속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걸음을 틀어 놀이터로 향했다. 종종 별이 눈에 많이 보이는 날이면 혼자 놀이터에 가서 한참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집에 가곤 했다. 혼자 가만히 앉아 별을 우주를 들여다보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그곳엔 누군가 그네에 앉아있었다. 너였다. 그때는 너를 잘 몰라서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한참을 고민했다는 걸 너는 모르겠지. 너는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숨이 눈에 보이는 계절인 겨울이라 네가 내뱉는 숨의 모양이 그대로 내 눈에 담겼다. 예뻤다. 그 풍경이, 그 모습이, 그 순간이 참 예뻤다. 이대로 돌아가기엔 하늘이 너무 예뻐서 집에 가지 않고 네 옆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고 그땐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니 그냥 네가 예뻐서였던 것 같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어릴 적 봤던 우주만큼 예뻐서. 너의 옆에 조용히 앉아 하늘을 보며 살짝살짝 너를 봤던 것 같다. 그제야 나는 네가 나와 같은 학년의 명찰을 하고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말을 걸어볼까, 한참을 망설였다. 안녕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까지 내가 얼마나 떨렸는지 넌 모를 거야. 몰랐으면 하고.


안녕. 수십 번의 망설임의 끝에 나의 혀끝을 떠난 말이 너와 나 사이를 울렸다. 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숨이 막혔다. 안녕. 너의 대답이 다시 한번 나와 너의 사이를 울렸다. 그리고 우리는 꽤 긴 시간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너와 나 사이를 채우는 그 정적과 공허함마저 나는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의 눈에 비치는 별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때 내 이유가 바뀌었다. 나는 별에 닿고 싶었다. 너의 눈에 담긴 그 별들에 닿고 싶었다. 그렇게 너는 내 소원의 이유가 됐다. 계속 너를 바라보면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아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그제야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본 밤하늘은 내가 지금껏 혼자 봤던 밤하늘이 아니었다.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내가 이제껏 봤던 밤하늘 중 단연 가장 예뻤다. 우리 가끔 이렇게 같이 별 볼래? 그 말에 홀린 듯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는 자주 놀이터에서 마주쳤고, 그해에 느지막이 내린 첫눈을 같이 맞았고, 같이 별을 봤다. 만남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점차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내 소원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네가 내 소원의 이유가 되었다는 건 끝내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별에 닿고 싶어. 나도. 정말? 응. 누군가 나와 같은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렇게 기쁜 일이었을까. 아마도 그 누군가가 너여서 그랬던 거겠지. 별에 어떻게 닿을 수 있을까? 밤을 건너야지. 나랑 같이 가자. 약속. 밤을 건너자는 말이, 약속한다는 말이, 이 모든 너의 말들이 마치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자꾸만 숨을 참게 됐다. 이내 너는 조용히 덧붙였다. 이 마음이 그대로면 새벽이 기다려줄 거야. 우리니까. 너의 말이 헷갈렸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내가 너의 말을 모두 이해한 건 시간이 조금 많이 지나서였다. 잔잔히 이어지는 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달의 바다에 가고 싶어. 그 말을 듣고 내가 그날 밤 달의 바다에 가는 법을 찾아 헤맸다는 것도 너는 모르겠지. 부디 몰랐으면 해. 아직도 조금은 창피하거든. 달의 바다. 너의 말을 듣고 한참을 속으로 되뇌었던 것 같다. 누구랑 가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 그날 내겐 또 하나의 소원이 생겼다. 너와 달의 바다에 가기. 그렇게 된다면 너도 나를 비로소 사랑하게 된 거겠지.


끊어지지 않을 것 같던 실도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다. 원치 않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너를 만나고 그리 멀지 않았던 날이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수험생이 된 우리는 바빠졌다. 정말 바빴다. 할 일도, 해야 할 일도 넘쳐나는 나날들 속에서 가만히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은 사치로 느껴졌다. 놀이터를 찾는 시간은 점점 뜸해졌고 너와 만나는 날 또한 드물어졌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렇게 완연한 봄이 찾아왔을 땐 너를 만나지 않는 하루가 더 익숙했다. 너는 겨울과 함께 찾아와 겨울과 사라졌다. 학교에서라도 만나면 됐을 텐데 그땐 뭐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너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만나지 못해도 나를 찾지 않는 네가 미웠던 걸까. 네가 미울 리 없었을 텐데. 이렇게 시간이 지날 줄 알았으면 그냥 너를 찾아갈걸. 너를 처음 찾아간 건 나였으니까 이번엔 네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른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네가 엮인 일에 있어서 어른스러워질 자신은 사실 아직도 없다. 시간은 다행히도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또다시 여러 번의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숨을 내뱉자 내 앞에 숨의 모양이 고스란히 보였다. 누군가의 숨을 알 수 있는 겨울이 되어서야 나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를 막 나섰을 때 네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긴 정적 끝에 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놀이터 갈래?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니까. 내가 너를 어떻게 거부해. 우리는 그렇게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놀이터의 그네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나는 긴 시간 고민했고 하지 않아 후회했던 말들을 꺼냈다. 내가 별에 닿고 싶던 건 너의 눈에 비친 별이 예뻐서,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서, 네가 좋아서 그랬던 거야. 오랜 시간 입술을 달싹이던 너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도 별에 닿고 싶다고 했던 말 기억해? 나는 지금도 그래.


너도 여전히 별에 닿고 싶어?


그러면 밤을 딛고 가자 우리.

어쩌면 새벽이 우릴 기다려줄지도 몰라.

아니면 달의 바다에 갈까.


우린 그해에 일찍이 내린 첫눈을 같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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