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89호 낭만 22화

No. 27

[오아시스] 청완

by 상경논총

오랜만에 공항을 가는 길은 꽤나 설레었다. 단순히 1년 만에 한국에 돌아오는 널 마중 가기 위해 가는 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히 기분이 들떴다. 저번 주부터 인터넷은 온통 너의 귀국 기사로 도배됐다. 한국이 배출한 천재적인 조향사, 향수계를 선도하는 브랜드의 오너, 새로운 향수의 세계를 연 선구자. 이 모든 대단한 말들이 너를 수식하는 문장들이었다. 특히 '시련을 이겨낸 한국의 히로인'은 너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로 꼽혔다. 2년 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후각을 잃었던 두 달 동안 너는 수납장 하나를 다 채울 만큼 향수를 계속 만들었다. 이름도 없이 그저 No.1, No. 2, No. 3, 이렇게 No. 27까지 만들자 하늘도 너의 노력에 감동했는지 너는 다시 향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너는 한국의 최고이자 완벽한 조향사로서 프랑스로 떠났다. 너를 표현하는 문장들은 하나같이 모두 거창하다. 너에게로 가면 내겐 거창해 보였던 이 모든 말들이 그저 너를 소개하는 한 줄에 불과해진다. 그렇다고 너를 상대로 딱히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른 감정이면 몰라도. 너의 성공을 누구보다도 응원했고, 너의 시간들이 허투루 흐르지 않길 간절히 바란 사람도 나였다. 이런 나의 바람을 안고 떠났던 프랑스행에서 너는 내가 상상했던 거의 모든 것을 이루었다. 그런 너로부터 지난주 이 시간, 아침 10시 23분. 문자가 왔다. 다음주 화요일에 한국 가. 아침 11시 20분 비행기. 데리러 와. 이 간결한 세 문장은 나를 공항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공항에 도착한 나는 게이트 앞에서 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미 기자들이 카메라를 든 채로 게이트 앞에 틈도 없이 붙어 서있었다. 저 카메라들의 플래시를 뚫고 너를 공항 밖으로 데리고 나갈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몇 분 더 기다리자 게이트 문이 열렸고 우산과 가방을 든 네가 걸어 나왔다. 너를 처음 본 날이 생각났다. 비 오는 날 학교 본관 문 앞에 있던 너와 달라진 건 너의 위상뿐이었다. 여전했다. 너도. 나도. 빌어먹게도 나는 9년째 너를 보면 떨렸다.


오랜만이야. 간신히 카메라 플래시 사이에서 너를 데리고 나와 내 차에 태운 나에게 네가 건넨 첫마디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그래도 어색하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나누자 금방 자주 만났던 사이처럼 분위기가 풀어졌다. 일은 재밌어? 응. 재밌어. 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한국의 대기업은 어때? 그냥 일하는 거지 뭐. 너의 물음에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답한 나는 사실 네가 몸은 좀 어떤지,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너 몸은 어때. 좋아. 건강하다는 너의 말에 살짝 안도한 나는 네가 말하는 곳으로 차를 이끌었다. 한국에 와서 첫 번째로 네가 향한 곳은 자신의 공방이었다. 일벌레. 일벌레라는 나의 말은 너는 그저 웃었다. 일이 아니라 낭만이야. 향수는 내게 사랑이자 로맨스 뭐 그런 거든. 그래서 나는 아무 향수나 안 만들어. 너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아직도 너를 눈부시게 했다. 가서 정리하는 거나 좀 도와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애초에 나는 너를 거절할 생각도, 거절할수도 없으니까. 너의 공방은 네가 떠나기 전 보여줬던 반 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먼지가 쌓인 것만 빼면. 너는 공방 앞에 놓여있던 택배를 뜯고, 그 안의 내용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향수들이 즐비한 진열장을 닦았다. 그때 너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너는 전화를 받았고 발신자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밖으로 나갔다. 누굴까. 일인 걸까. 거슬렸다. 사탕을 뺏긴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전화를 끊고 돌아오는 너는 미안한 얼굴로 잠시만 여기 있으면 잠깐 이 앞의 한국 지사에 다녀온다고 말했다. 네가 받은 전화가 단순한 업무 전화였던 것 같아 기분이 좀 나아진 나는 태워다 줄까 물었지만 너는 고개를 저으며 택시를 타고 가면 된다고 했다. 태워다 주겠다는 나의 말을 한사코 거절한 너는 귀국해서 호텔에 짐을 풀고 오기로 한 회사 직원 한 분이 있다며 오면 잘 맞이해달라는 말과 함께 떠났다. 홀로 남겨진 나는 너가 사라진 문만 한참 보다가 다시 진열장을 닦기 시작했다. 무리하면 안 되는데. 여전히 나는 너가 좋았고, 여전히 너가 많이 걱정됐다.


머지않아 공방의 문소리가 들렸고, 밝은 갈색의 단발머리를 한 여성분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당연히 똑같은 인사말이 되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 여성분은 먼저 인사를 건넨 나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긴 부담스러워 눈동자를 굴리다 다시 진열장을 닦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 순간 그 여성분이 입을 열었다. 셀레 정의 하트?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셀레 정은 너의 영어 이름이었다. 몸을 돌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나에게 내 이름을 말하며 내가 아니냐고 물었다. 내가 맞다고 하자 그녀는 그럼 내가 너의 하트라고 덧붙였다. 너의 핸드폰에 내가 사진과 함께 하트로 저장되어 있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름 석 자인데 나만 하트여서 눈에 띄었다는 그녀의 말은 믿기 힘들었다. 왜 내가 하트인 건데. 무슨 의미인데. 머리가 하얘졌다.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너도 혹시, 아직 나와 같은 걸까 하는 기대가 차올랐지만 간신히 눌러 내렸다.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네가 왜 나를. 내가 멋쩍게 웃으며 그러냐고 답하자 그녀는 눈치 빠르게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냐고 답했다. 내가 대답을 못하자 그녀가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여기서 셀레 정의 하트는 Love를 말하는 거예요. 자꾸만 머리가 정지돼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는 나의 말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나의 세상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대답만 남기고 나중에 네가 있을 때 다시 오겠다고 하며 공방을 떠났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나는 공방 구석에 있는 서랍장으로 뛰어갔다. 서랍장 문을 열자 네가 향기를 맡지 못할 때 만들었던 No. 1 향수부터 No. 27 향수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No. 1부터 하나씩 꺼내 뿌리기 시작했다. No. 1, No. 2, No. 3, … No. 27. 모두 새벽과도 같은 향기였다. 너한테서는 새벽 같은 향기가 나. 너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너, 이 향수들을 그렇게 만든 게 설마. 내게 남겼던 그녀의 마지막 대답이 다시 떠올랐다. 셀레 정은 향기를 맡을 수 없을 때, 향기를 못 맡는다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는 게 더 슬펐대요. 그래서 그 사람 향기를 떠올리면서 매일 향수를 만들었다고 했어요. 그런데도 그 사람의 향을 제대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서 더 힘들었다고도 했어요. 셀레 정을 그렇게 맹목적이게 만들었던 사람이 아마도 당신인 것 같네요. 어쩌면 너도 나와 같았던 걸까. 아니, 네가 나보다도 더 간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No. 1부터 No. 27까지 네가 만든 향수들을 모두 뿌렸다. 향수 냄새가 공방에 가득 차다 못해 밖으로 흘러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방에 다시 돌아온 너에게 나는 말했다. 이게 내 향기야. 너의 낭만이 내게서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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