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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지도

by 아침이슬

급식지도 배정표가 나왔다.

한 달 치 달력에 담당교사 이름이 날짜별로 적혀있다.

내 차례를 잊지 않게 달력에 동그라미 쳤다.

고등학교에서 기간제교사로 근무할 때는 시간을 정해놓고 당번처럼 지도하는 일은 없었다. 학생부장님이 식사하시기 전후에 급식실을 한 바퀴 둘러보셨던 것 같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급식실 내외부에서 항상 지도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첫 급식지도 하루 전. 다른 선생님들이 어떻게 하시는지 유심히 지켜봤다. 학생 수에 비해 좌석 수가 부족한 탓에, 안쪽부터 최대한 빈자리 없이 앉도록 했다. 6인석 식탁이지만 그냥 놔두면 6석을 모두 채우지 않는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 앉기 위해, 모르는 학생과 같이 앉기 어색해서 등등 저마다의 이유로 급식실은 금방 혼잡해진다.


급식지도 날. 일찍 점심을 먹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결의를 다졌다. 첫 번째 반이 입장했다. 수업시작 종소리를 못 들었다는 핑계를 그렇게도 대더니, 점심시간 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급식실에 도착해 있다. 가끔 4교시 수업을 끝내고 교실을 나설 때면 급식실로 달려가는 아이들 틈에 갇히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순간임을 인정한다.


오늘의 임무. 학생들이 임의로 자리를 선점하기 전에, 앉아야 할 테이블로 안내한다. 잠시 타이밍을 놓치면, 아이들은 눈치 보며 새로운 테이블에 자기들끼리 자리를 잡는다. 예외를 두면, 그다음부터는 계속 예외가 생기기 쉽다. 가능한 한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하려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확인해야 한다.


가끔 애매할 때가 있다. 6인석에 남학생 다섯 명이 앉았고, 뒤이어 다른 반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식판을 들고 걸어온다. 맨 앞에 오는 여학생을 남은 빈자리에 앉게 할 것인가, 새로운 테이블에 앉도록 할 것인가. 예외를 만들면 그다음이 힘들어질 것 같고, 이 정도는 유연해도 될 것 같다. 저 학생이 나였다면, 우리 아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떨까 생각도 해본다. 고작 한두 자리 비우는 건데 밥 먹는 순간만큼은 편하고 기분 좋게 먹는 편의를 봐주자 싶다.


그러다 문득, 일관성 있어야 한다는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다른 반 다섯 명 사이에 끼어서 어색하게 밥을 먹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급식실이 좁아서 어쩔 수 없다고 이해시키려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준을 적용시켜야 된다. 억울하게 혼자만 그랬던 학생이 나였다면, 불편한 상황에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학생이 있다면 어떨까. 같은 반인지 물어보고 조율을 해보자.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자리를 정확히 안내해야겠다고 마음먹다가, 이내 헛웃음이 난다. 이게 뭐라고. 그냥 아이들 밥 한 끼 잘 먹도록 옆에 있어주면 되는 건데 내가 너무 비장했나 보다.


일일이 자리를 지정해주지 않아도, 순서대로 빈자리를 찾아서 잘 앉는다. 다른 반이라도 웃고 떠들며 함께 밥 먹는다. 성별 관계없이 그냥 즐겁다.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 작은 정부를 주장했었던가. 아이들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데 내가 앞서나갔나 싶다. 그래도 당번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혹시 내가 지도를 허술하게 해서 교사나 학생들로부터 민원이 들어올까 봐, 사고가 있을까 봐 조금은 부담된다.


다음 급식지도 차례를 잊지 않기 위해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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