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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Oct 27. 2024

[프롤로그] 길을 걷는 한 사람


 야영을 할 때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족이 모두 잠든 후에, 조용히 텐트를 나와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드문드문 놓여있는 야영장의 주황색 가스등이 저만치 안내해주는 늦은 밤의 오솔길을 걷는 일입니다. 가족들이 머나먼 곳이 아닌 이 자연 속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으면서, 마치 홀로 낯선 여행을 떠나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둘째는 새벽녘 찬 기운에 이불을 여며가며 선잠을 자다가, 동틀 무렵 새소리에 눈을 뜨고, 은은한 솔 향기에 잠을 깬 후 일어나 이른 아침의 오솔길을 걷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이 세상의 첫날이기라도 한 듯, 공기는 상쾌하고 펼쳐진 자연은 청신하기만 합니다.      


 자연과 함께하는 늦은 밤의 산책과 이른 아침의 산책, 그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산책길에서는 차분한 가운데 자연과 교감하게 되고, 그러는 사이에 자신과도 교감하게 됩니다. 하루가 저물고, 사람들의 경쾌하고 흥겨운 담소도 하나둘 옅어져 가는 깊은 밤에 나 홀로 탁 트인 공기를 마시면서 자연 속을 걷고 있으면, 밤 속의 나는 저만치 소리 없는 달빛만큼이나 차분해집니다. 오늘 낮에 내가 늘 미안하게 생각하던 사람에게 반가운 연락이 오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게 되어 하루를 가벼운 마음으로 살았건만, 밤의 대지 위에 홀로 놓인 나는 왠지 다시 진중한 사람으로 되돌아가 어둡고도 은은한 먼 하늘을 바라봅니다. 정처 없는 회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는 하나, 그것은 부담스럽거나 아프지 않고, 그저 밤바람처럼 잔잔합니다. 이따금 바람이 잎사귀를 흔들면 지난 이야기들이 내 주변에 붑니다. 미처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어느새 내 발자국을 따라옵니다. 아쉬운 이야기가 저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듯도 합니다.      


 눈부시지 않은 투명한 햇살이 저 산 너머에서 채비할 무렵, 이슬 맺힌 연꽃이 가득한 연못길을 걷거나, 배추, 고추 등을 아기자기하게 심어놓은 채소밭 길을 걷거나, 그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숲길을 걸을 때조차도 이른 아침의 자연은 신선하게 나의 미소 속으로 들어옵니다. 새벽녘 찬 기운에 잠시 움츠러들었던 몸도 선선하면서도 따뜻하게 펼쳐져 가는 이른 아침을 걷노라면 이내 개운해집니다. 푸른 잎사귀에 투명하게 내려앉은 이슬을 보면, 번잡스러운 나도 세상에서 가장 맑은 사람이 되어 있는 듯합니다. 분명 나는 시름 많은 사람일진대, 아침의 오솔길을 걷고 있는 나의 발걸음은 너무나 맑고 가볍습니다. 그러나 마치 미지의 세상을 처음 만난 듯이 가슴이 설레거나 고조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보아왔던 시골길, 그러나 여태까지는 잘 몰랐던 그 어느 갈림길에 새삼 들어서는 것처럼 차분하면서도 새로운 기분이 듭니다.     


 굳이 야영이 아니더라도 우리 일상에서도 이러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출근길에, 그리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걷는 산책길에 우리 주변에도 자연이 있습니다. 아마도 삶의 희망은 밝은 자연에 묻고, 삶의 성찰은 어두운 자연에 물으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오솔길에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흔들려 온 것 같지만 사실은 변함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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