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하나. 삶의 끝에 남겨두고픈 1%의 충전
마지막 순간의 소중함을 간직할 수 있도록 1%의 힘만은 내게 남아있기를….
알제리 출신의 작가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조차 눈물을 보이지 않을 만큼 냉담하고 삶에 대해 무기력해 보였던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저지른 살인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후, 형 집행을 앞두고 자기를 면회 온 신부에게 퍼붓던 아래의 말입니다.
“너는 죽은 자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조차 없지 않나. 내게는 내 삶과 닥쳐올 죽음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있다. 나는 마치 이 순간, 나의 정당함이 인정될 이 새벽을 지금까지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과 같다.”
아마도 주인공은 죽음을 보고서야 삶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관악산을 찾았습니다. 수도권 주변의 산 중에서 관악산도 제법 산을 오를 때의 주변 경치가 괜찮았습니다.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는 수직에 가까운 바위 절벽 위에 지은 작은 절입니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세우고 공부를 했던 곳으로, 그 후 조선 태조 때 중건되었다고 합니다. 연주대를 향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핸드폰 충전을 충분히 하지 못해서, 산 정상에 가까울수록 충전 눈금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더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지금 내 마음을 움직이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어서, 연신 핸드폰으로 사진을 촬영하였습니다.
연주대를 향해 설치된 정상 부근의 포토존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위태롭던 나의 핸드폰이 연주대 촬영을 바로 앞두고 그만 방전되고 말았습니다. 핸드폰을 보았을 때 남아 있던 1%의 충전은 셔터를 누르기 바로 전에 그만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쉬웠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던 경치들도 아름다웠지만,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 위에 홀연히 서 있는 절의 모습은 왠지 꼭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려오면서, 나는 늘 그랬듯이 산이 주는 좋은 기운을 느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산행을 인생 여정에 비유한다면, 산을 오르면서 나의 마음을 움직였던 아름다운 경치들은 삶 속에서 이따금 찾아오는 기쁘고 아름다운 순간일 것입니다. 그리고 산 정상에서 보았던 마지막 빼어난 절경은 인생에서의 절정의 순간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살아갈 것 같지만, 결국 누구나 임종의 순간을 맞게 됩니다. 임종의 순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삶의 끝에 거의 다다른 환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통 외에 다른 것을 느낄 겨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안타까웠습니다. 거의 한계에 이른 것처럼 거친 숨만을 몰아쉬던 여인 앞에는 아버지마저 일찍 여읜 두 딸이 있었습니다. 두 딸은 마치 어린아이 달래는 듯한 말투로 엄마를 다독이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눈을 감은 것은 앳된 둘째 딸이 눈물을 거두고 엄마에 대한 위로 대신에 짐짓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씩씩한 말투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직후였습니다. 아마도 이미 1%의 충전도 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딸의 의연한 모습을 가져가기 위해 엄마는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임종에 이르는 과정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겠지만, 나는 그 임종의 순간을 오히려 우리 삶의 절정의 순간으로 간주하는 역설적인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정신이 혼미할지라도, 그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 그 마지막 순간에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또는 내 마음 속에 떠오를 사람들의 눈망울, 그 마지막 순간에 병실 너머 비치는 햇살과 들릴 듯 들리지 않을 새소리,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할 것인지…. 이 세상의 마지막과 막 열리는 저곳의 처음이 합일되는 그 순간은 두렵지만 또 얼마나 경이로울 것인지…. 그러나, 마치 위태롭던 핸드폰이 급기야 마지막 절경을 앞에 두고 방전되어 버리듯, 우리는 극한의 고통과 혼미함 속에서 그 생각을, 그 눈망울을, 그 풍경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떠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소원을 해 보았습니다. 내 삶의 한계에 거의 이르렀을 때에는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증표로써 나의 모든 전력(電力)이 소진되어 있되, 마지막 순간에 내게 주어진 소중함을 간직하고 떠날 수 있도록 그저 1%가 충전된 힘만은 내게 남아있기를….
생각 둘. 돌아갈 집
일터에서 지치고 힘들어도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낯선 출장지에서 외로운 선잠을 자도 며칠 후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첩첩한 산중의 병영에서도 언젠가 돌아갈 집을 꿈꾼다는 것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희망의 다른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돌아갈 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을 짓누르는 것인가요.
언젠가 누구에게나 찾아올 대지와의 작별의 시간. 그 너머가 칠흑처럼 어두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 너머에도 내가 돌아갈 집이 있다면 그 또한 희망인 것을.
집에는 포근한 휴식이 있기에, 잠깐의 외출이 힘들어도 넉넉히 견딜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