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장면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바쁘게 살아가는 나의 삶과는, 나의 목적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할애하여 아스라이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을, 바다 아래 이어진 섬과 같은 그들과 나의 연결을 생각한다면 나는 그만큼 더 넓어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에 조금 더 다가설 것입니다.
생각 하나. 어머니의 별들
바닥이 훤히 비칠 듯 투명한 사이판 바다
직각의 절벽 저 아래
유난히 짙푸른 바다가 흐르지도 않습니다.
관광객들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정겨운 사진을 남깁니다.
그 절벽 끄트머리에 서 보았습니다.
발을 헛디딘 것처럼 불현듯 중심이 흔들립니다.
수십 년 전, 그 나라의 병사들은 마지막 만세를 외치며
그래도 자신을 위로했는지도 모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해구 앞에서
그 외침 하나 붙들고 바다의 내면을 모른 척 했습니다.
낭떠러지에 선
어리고 순결한 또 한 무리의 청년들
어머니가 계신
헤아릴 수 없이 멀어진 곳을 밤마다 그리워했을 청년들
그들에겐 마지막에도
그런 마취약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직각의 절벽 저 아래
속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흐르지도 않습니다.
[만세 절벽]
사이판 북쪽 끝에 위치한 곶으로, 1944년 사이판 전쟁에서 미군에게 밀린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이 그들의 왕과 국가에 대한 만세를 외치며 바다에 뛰어든 곳으로, 여기에는 강제로 끌려온 어린 한국 청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생각 둘. 어느 축복
세상에 대한 여러 축복 가운데, 나에게는 어느 한국 청년 전범 사형수의 축복이 가슴에 가장 와 닿습니다. 한국인 전범, 그들의 한은 조금 특별합니다.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가해자로 낙인찍혀서 처형당해야 하는…. 다시 찾은 세상의 빛을 눈앞에 두고, 더 짙은 어둠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원망보다는 세상을 위로하고 축복해 줍니다.
한국인 전범 사형수인 조문상은 조선인 포로감시원이었습니다. 역사박물관 전시회에 전시된 그의 유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26년의 생애 가운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을, 타인을 모방하며 자신만의 지혜와 생각을 갖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운명의 타종 소리를 들으며 부모님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누나, 동생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유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죽음을 앞둔 자신을 앞서 형장으로 간 다른 사람처럼 장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아래의 말로 세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온기를 남깁니다
“세상이여, 행복 있으라”
생각 셋. 그날의 DMZ
어린 시절 십자가는 그에게 원수마저 해하지 말라는 거역할 수 없는 옥조를 내려주셨습니다. 먹구름 아래 꽃잎이 흔들립니다. 비가 내리고 어느새 붉은 꽃물 번져가면 그는 늘 간직해온 십자가를 떨구고 함부로 된 사람으로 탈바꿈합니다. 살 내음 연기가 수척해진 양심에 와 닿으면 바닥에 널브러진 꽃잎을 추스르고 시들어버린 제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비 그친 전선의 밤 흩날리던 꽃잎 같은 굽이진 철책의 불빛이 병사의 신앙처럼 외줄을 탑니다.
아침 순찰을 나선 분대의 행렬을 반기듯 방책선을 따라 늘어선 돌계단에 새봄이 한 걸음씩 내려앉습니다. 푸른 뜰에서 잠시 설레는 사향노루의 눈동자에 이내 굵은 격자무늬가 그어집니다. 반복되는 하루의 순환에 일찍이 적응해 버린 이곳에서 촌각이면 무너질 고요는 수십 년간 관성으로 버티어왔습니다. 저물녘 투광등 빛이 저만치 팔을 뻗고 앳된 초병의 눈길이 주황색 환영을 잠시 보았다가 시간이 흘러도 친숙해지지 않는 어둠 위에 놓인 평화를 조용히 관통합니다.
눈을 감으매 어느 날인가 꽃잎의 전설도 초병의 모습도 자취를 감춘 그곳에 사향노루는 이곳저곳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티없는 눈망울을 높이 들며, 저 멀리까지도 잘리지 않은 어느 트인 아침을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생각 넷. 우리의 소원
눈을 감고 북녘의 산하를 그려봅니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흐린 산수화, 거기엔 왠지 나무들마저 성깁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 와도 메마른 나뭇가지만 보이고, 새소리조차 어쩐지 처연하게 내려앉습니다. 사람이 그어 놓은 선을 사이에 두고 강산마저 바뀌었는가. 그토록 짙은 편견이 자연마저 덧칠하나 봅니다.
수년 전 평양 어린이예술단이 내한하여 우리 어린이들과 함께 합창했던 장면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가슴 속 잠겨있던 하나 된 조국을 불러내는 아련한 노래…. 아이들은 한가득한 표정으로 저 깊은 곳에서 한 소절씩 꺼내어 부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이 정성 다해서 통일을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라 부를 뿐. 어찌 된 일인가 나의 목줄기는 분화구로 이어진 화도(火道)가 되었습니다. 훈련된 노래지만 진심은 마디마디 울렸습니다. 어느덧 손을 맞잡고 일어선 관중석에 있던 노련한 어른들의 후렴도 지각이 균열하듯 울려 나갔습니다. 짙은 화장이 동안을 덮고 영문도 모르게 그 목소리 철들었어도 어린 눈동자는 이렇게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자유, 꿈에도 소원은 자유….
내 주변의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던 그 아이들의 천진스런 표정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북녘의 산하를 그려봅니다. 흐린 덧그림을 거둬내니 푸르름이 울창합니다. 나뭇가지에 초록 잎새가 가득하고, 새들의 합창은 산세를 타고 먼 곳까지 울려 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