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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Oct 27. 2024

'대'와 '소’

생각 하나. 하나를 지켜 모두를 위한다          



 정치집단에서 흔히 쓰는 말이 '국민'입니다.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이 원한다면, 국민을 위하여 등등. 그런데 나는 국민인가요? 국민의 사전적 의미가 국가의 구성원 전체뿐 아니라 각 개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전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나는 분명 국민의 일부분이지만 그 속에서 ‘나’라는 개인이 차지하는 부분은 소위 극미량에 불과합니다. 정치집단이 국민의 뜻을 언급할 때 그것이 나의 뜻을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 국민 중 한 명이 테러 집단에 인질로 잡혔을 때, 그들이 인질의 몸값으로 거액의 국민 혈세를 요구하거나 어떤 정책 변경을 요구한다면 우리 정부는 인질이 희생되더라도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곤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국민 한 사람의 희생을 막고자 하면서 그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와 다른 목적을 위하여 국민의 희생 자체를 감수하는 행위가 있을 때, 그러한 거부는 후자에 속할 수 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일종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입니다. 그렇더라도 여기서 두 가지 관점에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첫째는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 자체가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어쩌면 '대'와 '소'를 혼동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테러 집단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을 소위 '대'라고 해봅니다. 그런데 진실은 그것이 '대'가 아니고, 오천만 분의 1이기는 하지만 국민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실재하기 어렵지만, 만약 우리 국민 상당수가 인질로 잡히는 경우에도 여전히 그들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테러집단과 협상하지 않는 것은 협상을 목적으로 하는 또 다른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을 줄였다는 '득'이 있는 반면에, 모든 국민에게 나도 저런 상황에서는 소위 '대'를 위해 가차 없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가장 존엄하다는 사람의 생명 가치도 결국 어떤 명분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생각을 심어준다는 커다란 '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테러 집단과의 협상은 한 번의 단호함으로 테러의 의지를 꺾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나쁜 짓'을 계속하게 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모든 사안에 대하여 '소'를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인질 사례를 예로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 국민의 희생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질 사례와 같이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사안에서는 분명 무엇이 '대'이고 무엇이 '소'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거나, 설령 '소'로 결론이 날지라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그 자체로도 타당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위 또다른 (또는 진정한) '대'를 지켜내는 결과가 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많은 위정자들이 '국민'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개인'도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국민은 배려를 받은 그 개인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데, 비단 위정자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대’와 ‘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 둘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많은 사회 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하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슬로건으로 유명한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는 이를테면 사회 전체적으로 행복이 증가하면 소수의 불행도 감내할 수 있다는 논리로 흐를 위험성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무고한’ 한 사람을 희생시키면 전체 사회가 안전해질 수 있는 다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볼 때, 공리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그 한 사람을 절대로 희생시킬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공리주의에 의하면 그러한 희생을 묵인할 수도 있으나,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지켜보아야 하는 전체 사회의 괴로움을 측정할 수 있다면, - 그리고 그 괴로움이 엄청나다면 – 공리주의에 의해서도 여전히 그 사람을 희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리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는 관심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고방식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결론은 동일하게 도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대’를 위해서도 희생해서는 안 되는 ‘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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