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난 '사랑'이란 단어를 말할 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한다는 말을 태어나 처음 꺼낸 것도 스무 살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이런 나와는 달리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맛있다, 나 이 음식 사랑해', '우린 사랑하고 있어', '난 내 삶을 사랑해'.
사랑이란 단어를 남발하는 그들이 실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선 내심 부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사랑이 넘칠 수 있을까? 어느 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엔 반드시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걸까?
'진정한 사랑'의 기준이 존재할까?
혹시 내가 사랑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일명 '모태솔로'인 한 친구는 서른이 훌쩍 넘도록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그런데 과연 그 친구가 쌍방의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고 해서 사랑을 모를까?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뉴욕 아이 러브 유 (2009) / 로렌스 애니웨이 (2013) / 그녀 (2014)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오늘 소개하는 이 영화들은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그런 완벽한 사랑이야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는 대부분 찌질하고, 부끄럽고, 실수하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이뤄지지 못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주인공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조제는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라는 남자를 만나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둘은 결국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이별하게 된다. 비록 둘의 사랑은 씁쓸하게 끝나버렸지만 조제는 츠네오와의 연애를 통해 스스로 세상에 나아갈 힘을 얻는다.
누군가는 지나간 사랑을 '실수'라고 부르고, '시간낭비'였다며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직접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린 다른 이와의 교감을 통해 서로 많은 것을 배우고 발전하며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랑은 그전까지 아무 상관없던 두 우주가 만나 엉키고 서로의 빛깔로 물들여 인생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다. 이미 섞여버린 두 가지 색의 물감을 다시 나눌 수 없듯, 경계가 허물어진 두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한다.
사랑의 시작과 끝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의 프레드(수잔 클레망) 역시 사랑했던 연인 로렌스(멜빌 푸포)와 현실적인 이유로 이별하게 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열정적인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와 함께 부족함 없는 결혼 생활을 하는 프레드.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로렌스와 함께했던 둘만의 비밀스러운 행동을 반복한다. 작가로 살아가는 로렌스 역시 자신의 모든 글 속에 프레드만이 알아볼 수 있는 상징을 남긴다. 둘은 헤어진 후에 연락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지만 이렇게 수년간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관계가 끝난다고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며, 사랑이 끝났다고 관계도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옆에 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고, 다신 볼 수 없다고 해서 사랑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은 운명이 아니다
영화 <뉴욕 아이 러브 유>는 간혹 주제가 뭔지 알 수 없다는 평을 듣는다. 밤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가벼운 멘트로 작업을 거는 남자, 카메라에 우연히 잡힌 이름 모를 여인에게 집착하는 감독, 서로 처음 만난 듯 상황극을 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중년의 부부 등 뉴욕 곳곳에서 벌어지는 12가지의 짧은 스토리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영화다. 결말이 명확한 영화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대체 이게 뭔가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가 수시로 맞이하게 되는 사랑의 순간을 보여준다.
처음 보는 이성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순간, 카메라 앵글을 통해 신비로운 여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저 아무 일 없이 스쳐 지나갈 수 있던 그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하루를 살아갈 힘, 커다란 사랑이 된다. 어쩌면 사랑은 어느 소설에서처럼 인생에 딱 한번,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거창한 게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사소한 교감이 아닐까.
내가 마음을 준 그 모든 것에게
누군가는 Ai와 깊은 사랑을 하는 영화 <그녀>를 보고 기괴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쯤 어린 시절에 특정 인형이나 장난감에 집착하고 스크린 속 유명인에게 마음을 뺏기거나, 음악, 영화, 책 등을 통해 가슴 충만한 행복을 느껴본 경험은 있을 것이다. 사랑에 엄격한 조건을 매길 필요가 있을까?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매일, 어떤 형태로든 오고 간다.
오늘도 나의 하루는 사랑으로 가득 찼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우연히 들었던 음악을, 읽었던 책 속의 한 문장을 사랑했다. 이 글을 쓰며 지난 사랑을 떠올렸고, 나 자신을 위해 요리를 했고, 안타까운 뉴스 기사를 보고 이름 모를 그를 위해 기도했고, 친구의 고민을 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