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로(初老)의 감성을 흔들리게 하는 맛과 멋.

제주 살기 17.

by 바다나무

아침에 나와보니 따뜻한 햇살에 나무와 꽃들의 싱그러움이 돋보인다. 어제 내린 비에 목욕재계라도 한 냥 푸르르게 옷을 갈아입고 기지개를 켜며 희망의 아침을 선물한다. 자연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한다. 퇴직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주어진 정해져 있는 시간도 지났고, 또 다른 덤도 가져 본 상황이라 미련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의 이 자유와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도리를 다해준 자연에게 나도 관광객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할 시간이다. 녹색샤워를 하고 깔끔한 몸으로 보여준 성의에 감사함을 표해 보련다. 다소 걸음수가 많아지고 비가 오다 보니 몸이 찌뿌둥하고 작은 요통이 느껴졌다. 들어하는 몸을 달래주고 어루만져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운영하는 환경성질환센터인 비자림 힐링센터로 향했다. 사전예약을 해둔 터라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 함께 오래 살아온 눈치 빠른 남편의 알아차림 덕이다.


녹색샤워는 산림욕을 말한다. 자림 힐링센터에서는 편백나무로 가득한 실내에서 건. 습식 사우나, 족욕, 부위별 마사지. 간단한 건강체크(인바디, 자율신경)를 해준다. 평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건강신호등을 체크해 보는 시간 가졌다. 코끝을 파고드는 피톤치드가 남아있던 마음의 찌꺼기와 몸속 독소를 거해 준다. 앗!, 몸무게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다. 이건 순전히 제주 맛집 탓이다. 걷고 또 걸었음에도 먹은 양이 넘쳤나 보다. 하지만 어쩌랴, 나이 들면서 다소 살집이 있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하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개운하다. 단돈 오천 원의 행복이다. 산림욕을 마치고 옆에 있는 비자림 숲을 갔다. 관광객이 많아 날짜를 보니 주말이다. 요즘은 정신없는 자유에 날짜 지나는 것도 깜빡한다. 천년고목 비자나무 앞에서 백 년도 못 사는 삶을 위해 아등바등했던 시간들이 속절없이 느껴진다. 연리목 앞에선 노년의 사랑이 막걸리처럼 농익어가길 바랄 뿐이다. 숲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며 걷다 보니 그동안 몇 번씩 와서 보았던 숲이 색다르게 보였다. 천년의 비자나무 등뒤에 숨어있는 수목번호 숫자 1이 이 숲에서 오랜 세월 지킴이노릇 한 연륜(年輪)의 표식임을 이제 알았다. 비바람 몰아치는 천년의 세월을 한자리에서 묵묵히 지켜이 대단하여 그동안 수고했다고 치하해 본다. 한 곳에 머문 나의 40년 가까운 월도 결코 쉽진 않았으니까...


우리는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왔었다. 큰딸나이만큼 시간이 지났다. 오늘은 그 추억을 되살려 돈가스를 먹기로 했다. 그 옛날 데이트 장소의 먹거리는 단연 경양식집 돈가스가 으뜸이었다. 그것이 가장 멋지고 우아한 데이트의 대명사였다. 양도 많고 옛날 풍미를 살린 제주도 흑돼지 돈가스다. 참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이 새로운 감성을 일으켜 신혼열차에 나도 모르게 올라탔다. 여행하면서 가끔씩 예비 신혼부부들의 야외서 웨딩촬영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희망과 셀렘으로 가득 찼던 피앙세. 거기에 나도 있었다.


점심을 먹고 해변가 카페로 갔다. 조그맣고 앙징맞은 카페이다. 작은 소품들이 아기자기 전시되어 있고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창가에 책꽂이가 준비되어 있다. 이곳이 당근이 유명한 지역이라 당근케이크와 커피를 주문하고 앉았다. 통창으로 비친 바다는 오늘 바람이 거세 너울성 파도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무심코 꺼냈다. 만화책이다. 학창 시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보았던 순정만화를 접해 본 후 얼마만인가. 만화를 보다가 부모님이 오시면 여 공부 안 한다고 꾸중 들을까 봐 얼른 이불속에 감추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가 마주한 책은 '내면 아이를 조용히 바라보는 우울증 극복이야기'책이다. 작가는 우울증을 "기분 없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책을 덮고 지금의 내 기분의 유무(有無)를 살펴보았다. 철없는 감성으로 천방지축 뛰어나디고 있다. 두 팔 벌려 푸른 바다를 안고 맛집으로, 카페로 이리저리 자리옮김한다. 30대 딸이 들으라고 USB에 넣어 준 발라드 음악을 듣다가, 7080 세대의 통기타 음악을 들으며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간다. 해변을 산책하다 젊은 사람들이 예쁘게 포즈 취해 사진 찍으면 나도 한컷 따라쟁이 한다. 드라이브를 하다 갈매기가 날면 차창을 열고 손을 휘젓어 하늘을 공유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울증은 아닌 것 같다.


바다를 보며 책을 읽고 있으니 따뜻한 커피가 나왔다. 둘만 있는 커피숍에서 주인장은 사진 한컷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그 사진 속에는 세월 속에서 저물어 가는 초로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외롭거나 슬프거나 쓸쓸해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다. 주인장이 예쁘고 두 분이 좋아 보인다고 했으니까. 빈말이라도 그리 믿으련다. 차를 마시고 일어서면서 나의 소중한 감성이 깨어질까 봐 아기자기한 소품 중 작은 키고리(KEYRING)를 하나 샀다. 예쁜 바다(고양이)가 새겨진 앙징맞은 키고리를. 집 지키고 있는 작은딸에게 선물겠다는 명분으로.


월정리해변을 드라이브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이 추운 날 오픈카를 타고 손을 흔드는 젊음을 보았다. 부러웠다. 제주는 오늘 추억을 되찾아 주어 나를 설레게 한다. 초로에 접어든 내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바퀴를 달아 주었다. 다음여행엔 오픈카를 타고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 잠시 해본다. 람에 내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을 연출해 보고 싶졌다. 책이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 인생이고 주인공은 나니까. 오늘 추억의 튀김고기 한 조각에, 작은 액세서리 하나에 초로(初老)의 나의 감성은 흔들렸다.


※ 혹시 모를 여행자를 위해 다녀온 장소를 기록해 본다.(제주환경성질환센터. 비자림. 얌얌 돈가스. 유유무문 카페. 월정리 해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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