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183번.
플리처 상 수상작입니다. 1870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은유로, 주인공 아처의 순진함은 제목의 '순수'에 비추어 역설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했으나 가질 수 없었던 모든 것, 현실에 묻혀 젊은 시절의 이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회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이디스 워튼의 시선 >> - 메이와 결혼한 아처는 그녀의 순수함이 인공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결혼생활에 환멸을 느낍니다. 이에 순수한 사랑에 빠졌던 유부녀 엘렌과 도망치려 하지만, 뉴욕의 사교계는 엘렌을 추방시켜 버립니다. 아처는 그제서야 메이가 주축이 되어, 모두가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노년이 되어 엘렌과 만날 기회가 오지만 포기하고 맙니다.
* 아처는 그녀를 꼭 껴안으면서 속삭여 불렀다. "메이." 약혼하고 처음 맞는 순간을 비록 무도회장에서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속에 뭔가 엄숙하고 신성한 것이 있다고 느꼈다. 이렇게 순결하고, 눈부시고, 착한 여인을 곁에 데리고 새로운 삶을 막 열려는 참이지 않은가!
* 뉴랜드 아처는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그와 메이라면 훨씬 덜 추잡하고 모호한 이유로도 서로의 유대 관계가 허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점잖은' 남성으로서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를 숨겨야 하고, 그녀는 혼기에 든 처녀로서 숨길 과거가 없어야 한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그들은 진짜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 않은가? 상대방에 대한 사소한 일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서로에게 싫증이 나고 오해가 생기거나 짜증을 내게 된다면?
* 그는 약혼녀의 환하게 빛나는 미모, 건강, 승마술, 우아한 태도와 게임할 때의 민첩한 머리 회전, 자신의 지도 아래 계발하기 시작한 책과 사상에 대한 수줍은 관심에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를 한번 슬쩍 훑어보면 이 모든 솔직함과 순진함이 단지 인공적으로 꾸며진 데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낙담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은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본능적으로 뒤틀린 교활함에 가득 차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 "여기에서는 아무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건가요, 아처 씨? 진짜 고독이란 거짓 흉내만을 요구하는 이런 사람들에게 온통 둘러싸여 사는 거예요!" 그녀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가 흐느낌으로 들먹였다.
* 엘렌 올렌스카는 대답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서 떨어져 난롯가 반대편으로 가 버렸다. "아, 날 사랑하면 안 돼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어요."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처도 낯빛이 변해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이보다 더한 책망은 없었다. "난 당신을 사랑한 적 없소.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테고. 하지만 당신은 우리 중 한쪽이라도 가능한 상황이었더라면 내가 결혼하고 싶었을 여자요."
* 올렌스카 부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가 만난 지 100년은 된 것 같아요······. 다시 만나려면 또 100년이 흘러야 할지도 모르지."
* 그는 결혼 생활에서 첫 여섯 달 동안에 제일 힘든 법이라는 흔한 격언을 위안 삼았다. '그 시간만 잘 넘기면 서로의 모난 면들이 닳아서 둥글둥글해지게 될 거야.' 그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메이가 가하는 압력이 그가 가장 날카로움을 잃고 싶지 않은 바로 그 모난 부분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전하기도 했다. 말은 침묵으로 이루어진 긴 대화에 딸린 부속물에 불과한 순간들이 있었다. 아처는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녀의 지난 일을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자기 얘기는 삼갔다.
* "당신은 적어도 그런 지루함 속에 아름답고 섬세하고 정교한 어떤 것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었어요. 내가 다른 삶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조차도 그에 비하면 싸구려로 보일 정도였지요. (···)가장 정묘한 기쁨을 얻으려면 얼마나 많은 어렵고 초라하고 천한 것들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지 미처 몰랐나 봐요." 그녀는 힘겹게 애써 자기 생각을 따라가면서 말을 이었다.
* 그가 올렌스카 부인과 함께 보낸 그 한여름날 이후로 넉 달이 흘렀다. 그때 이후로 그녀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아처는 그녀에게 딱 한 번,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는지 묻는 간단한 편지를 썼는데, 그녀의 답장은 훨씬 더 짧았다. "아직은 안 돼요." 그 후로 그들 사이에 더는 연락이 없었다.
* 그는 자기 마음속에 일종의 성소를 만들어 놓고 비밀스러운 생각과 열망 가운데 그녀를 간직해 두었다. 그곳은 조금씩 그의 진짜 삶이자 이성이 활동하는 유일한 장이 되어 갔다. 그는 거기에 읽은 책, 정신의 자양분이 되는 생각과 감정, 판단과 공상을 가져다 놓았다. 그 바깥의 실제 삶이 펼쳐지는 무대에서는 갈수록 비현실적이고 불만족스러운 느낌만 커져 갔고, 넋을 잃은 사람이 자기 방에서도 가구에 여기저기 부딪치듯이 익숙한 편견과 전통적인 관점과 이리저리 충돌했다. 넋이 나갔다······. 그가 바로 딱 그런 상태였다. 가장 현실적인 것과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마음이 떠나 버려서, 때때로 그들이 아직도 자기가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 "엘렌을 꼭 만나 보셔야 해요. (···)당신은 틀림없이 그녀를 만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분명한 동의하에서예요. 또한 이 기회에 당신이 부추긴 대로 행동한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그녀에게 알려 줬으면 좋겠군요." 그녀는 이 말없는 전언이 끝까지 그에게 전달될 때까지 램프의 나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를 낮추고 전구를 올린 다음, 잘 타지 않는 불을 입으로 불었다. "등불을 불어서 꺼 버리면 냄새가 덜 날 거예요."
* "그럼 당신 생각은 내가 당신의 정부가 되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당신의 아내는 될 수 없으니." 그녀가 물었다. 그는 노골적인 질문에 흠칫 놀랐다. (···)"난 어떻게든 그런 말, 그런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세계로 당신과 함께 떠나고 싶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삶의 전부가 되는, 인간 대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곳, 그 밖의 어떤 것도 중요치 않을 그런 곳으로."
* 그는 요즘 쓰는 말로 '선량한 시민'이었다. (···)그의 전성기는 충만했고, 매일이 고상한 일로 빽빽이 채워졌다. 남자라면 누구나 살아 볼 만한 삶이었다. 그가 놓친 것이 있다면 인생의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얻기 어렵고 가망 없는 것이어서, 복권에서 1등을 뽑지 못한 것처럼 놓쳤다고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그의 복권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표가 있었지만 상은 딱 하나뿐이었으므로 그 기회를 잡는다는 건 그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면 책이나 그림 속 가공의 연인을 생각할 때처럼 막연하고 평온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희미하고 미약했으나, 그 환상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결혼이 지루한 의무일지라도, 의무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일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어쨌거나 흘러간 옛날이 좋았다.
* 단 몇 개의 거리를 건너, 몇 시간만 지나면 엘렌 올렌스카가 있다. 그녀는 끝까지 남편에게 되돌아가지 않았고, 몇 년 전 남편이 죽은 후에도 생활 방식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이제 그녀와 아처를 갈라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오후 그녀를 만날 것이다. (···)"하지만 난 이제 겨우 쉰일곱이야·······." 그러고는 발길을 돌렸다. 이런 한여름날의 꿈을 꾸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러나 그녀 가까이 복된 고요함 속에서 우정이나 동지애를 조용히 나누는 것이야 안 될 리 없을 것이다.
* 아처는 벤치에 앉아 차양이 쳐진 발코니를 계속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탁자 위에는 진달래가 무더기로 꽂혀 있고, 그녀는 난롯가 가까이 소파 구석에 앉아 있을 것이다. "올라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편이 내게는 더 현실 같지." 그는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의 마지막 그림자가 희미해질까 두려워 의자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하인이 발코니로 나와 차양을 걷고 덧문을 닫았다. 그것이 마치 기다리던 신호이기라도 한 듯, 뉴랜드 아처는 천천히 일어나 호텔로 혼자 걷기 시작했다.
<페이지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