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275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중 많은 부분이 도서관과 책에 대한 참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수록된 열입곱 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미로 속에서 길을 잃으면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뒤집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갑니다. 미셀 푸코는 '20세기의 도서관' 보르헤스에 대해, "그의 문장을 읽고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생각한 모든 사상의 지평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언급합니다.
【 서문 】 - 나는 미래에 다가올 세대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될 것이다.
*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것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 - 틀뢴의 백과사전은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 나는 알려지지 않은 행성의 전체 역사를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다룬 자료 일부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그 행성의 건축과 카드 패, 소름 끼치는 신화와 그 언어의 속삭임, 그곳에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쟁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모든 것들이 눈에 띌 정도의 교리적 의도나 패러디적 요소 없이 분명하고 조리 있게 서술되어 있었다.
* 틀뢴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공간 속에 물체들이 뒤섞인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독립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연속물이다. 그것은 연속적이고 시간적이지만 공간적이지는 않다.
* 틀뢴의 고전 문화가 오직 하나의 학문, 즉 심리학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 외의 학문은 모두 심리학의 하위에 속해 있다. 나는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이 우주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적으로 전재되는 일련의 정신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 바벨의 도서관 】 - 도서관은 지식의 무한성, 우주와 그 혼란의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 당시에는 인류에 관한 기본적인 수수께끼들, 즉 '도서관'과 시간의 기원이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이 중대한 수수께끼들이 언어로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럴듯해 보인다. 만일 철학자들의 언어로 불충분하다면 여러 모양의 '도서관'은 그런 설명에 필요한 전대미문의 언어와 그 언어의 어휘와 문법 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 '도서관'은 모든 언어 구조와 스물다섯 개의 철자 기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변형체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허튼소리는 하나도 없다. (···)유일한 종족인 인류가 멸망 직전에 있다 해도 '도서관'은 불을 환히 밝히고 고독하게, 그리고 무한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고 비밀스러운 책들을 구비하고서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세상을 한계가 없는 것으로 상상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책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잊고 있다. 나는 그 오래된 문제에 대해 '도서관은 무한하지만 주기적이다.' 라는 말로 해결책을 제안하고자 한다.
【 칼의 형상 】 - 한 남자가 자신의 얼굴에 생긴 활 모양의 잿빛 흉터에 얽힌 사연을 밝힙니다.
*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면, 그건 마치 모든 사람이 그 일을 한 것과 마찬가지요. 그래서 어느 동산에서 있었던 단 한 번의 불복종이 모든 인류를 전염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부당하지 않소.
* 장군의 커다란 저택에서 우리는 아흐레를 보냈소. (···)나는 그가 자기 신변 보장을 요구하는 소리를 들었소. (···)군인들이 나를 체포하기 전에,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소. 나는 장군이 수집한 무기들 중에서 신월도를 뽑았소. 그리고 초승달 모양의 쇳덩이로 그의 얼굴에 영원히 가시지 않는 피의 초승달을 새겨 놓았소.
*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요? 내가 치욕의 흔적을 얼굴에 새기고 다니는 것이 보이지 않소? 당신이 끝가지 이 얘기를 듣도록, 이런 방식으로 말했던 것이오. 나는 바로 나를 보호해주었던 사람을 밀고했던 사람이오. 내가 바로 빈센트 문이오. 이제 나를 마음껏 경멸하시오.
【 비밀의 기적 】 - '무한한 세계를 담은 절대적인 한 권의 책'을 꿈꾸는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 흘라딕은 (···)어둠 속에서 하느님에게 말했다. "만일 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고, 만일 제가 복제품이거나 실수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면, 저는 「적들」의 저자로서 존재합니다. 제 존재를 정당화하고 당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도록 이 작품을 마치기 위해 일 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당신은 세기들과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그 날들을 제게 주십시오"
* 검은 색안경을 낀 사서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찾으시지요?" 흘라딕이 대답했다.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서가 말했다. "하느님은 클레멘티눔 도서관이 소장한 사십만 권 중의 한 책에 있는 한 페이지의 글자들 중의 하나에 있어요. 내 부모들과 내 부모들의 부모들은 그 글자를 찾았지요. 나도 그것을 찿느라 눈이 멀어 버렸소." 그는 안경은 벗었고, 흘라딕은 이미 죽은 그의 눈을 보았다.
* 세상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목소리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노라." 여기서 흘라딕은 잠을 깼다. 그는 인간의 꿈은 하느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과, 만일 꿈에서 들은 말이 또렷하고 분명하며, 그것을 말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면, 그 말은 성스럽다고 한 마이모니데스의 글을 기억했다.
* 무기들이 모두 흘라딕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를 죽일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에도 세상은 계속 움직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마당에는 벌의 그림자도 그대로 있었다. 다른 하루가 지나갔지만, 그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그는 신에게 자기의 작업을 끝낼 수 있도록 꼬박 일 년이라는 기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그에게 일년을 부여했다. 하느님은 그에게 비밀의 기적을 내렸다. 독일군의 탄환은 정해진 시간에 그를 죽일 것이었지만, 하사관이 명령을 내리고 군인들이 명령을 실행하는 사이에 그의 마음속에서는 일 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는 기억 이외의 그 어떤 문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덧붙이고 있던 6음절의 운문을 하나하나 익혀야만 했다. (···)그는 시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세심하고 비밀스럽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고상한 미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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