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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냥 Mar 06. 2024

나를 괴롭혔던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망각은 선물인지도 몰라.

  상담교사가 되고 첫 발령받은 곳에서, 나는 최악의 인연을 만났다. 구구절절 쓰기에는 입이 아프니 딱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그저 [역대급]. '같은 상담교사로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저런 사람이 아이들을 상담하고 마음을 치유해 주지? 동료의 이야기도 귓등으로 안 듣는 사람이, 학생들의 이야기는 과연 제대로 들어줄까?' 별별 생각이 다 들게 하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과 함께 하는 1년 동안 별의별 질환에 시달리며 몸고생, 맘고생을 했었다.


  이후 우연히 책을 읽다가, '나르시스즘'에 대한 글을 만나게 되었는데, 너무나 '그 사람' 같은 특성들에 혼자서 조용히 그 사람이 '나르시스트'가 아니었나 의심해 볼 뿐이다.


  그 후 그 사람과 내가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되고, 그대로 소식이 뚝 끊겼을 무렵, 친하게 지내는 상담교사 동생이 문득 말을 꺼냈다.


  "언니 그 사람 말이야. 언니 00에 있을 때 엄청 힘들게 했다는 그 사람."

  "응?"

  "그 또라이, 이번에 발령받은 학교에서도 말이 많았나 봐, 적응 못하고 지방으로 시도 간 이동 신청해서 간대."

  "헉 정말?"

  "응응. 언니는 더 이상 마주칠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근데 그 사람 이름이 뭐였지?"

  "어...?"


  어? 그러... 게...?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놀라웠다. 함께 지내는 1년 동안 내내 그 이름을 곱씹으며 분노의 발차기를 했던 적이 불과 3년 전인데. 그 이름이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름은 물론이고, 성이 김이었는지, 박이였는지 조차 헷갈린다. 게다가 나를 벌벌 떨게 했던 그녀의 모습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검은 생머리만 떠오를 뿐, 이제는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 그렇구나. 그것도 다 한때구나. 힘들었던 시간도, 나를 힘들게 한 사람도 다 흐르는 시간 속에 희미해져 가는구나. 그리고 다행임을 느꼈다. 내가 소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음에. 내가 망각하는 인간이라는 점에.


  간혹, 상담실에서 과거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있다. '초등학생들이 과거라고 해봤자, 얼마나 된다고.'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반성하길 바란다. 아이들이 꺼내는 과거의 기억은 매우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그리고 3년 전의 나처럼, 그때의 잔상을 곱씹으며 아파한다.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애초에 상처를 주고받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상처를 받았다면 가끔은 망각과 시간의 힘을 믿어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고.


  예전에, 연수를 듣던 중 강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학교폭력으로 인한 상처는 몇 년이 갈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고, 강사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통상적으로는 10년이라고 합니다. 10년이 짧게 느껴지시나요? 10년의 시간 동안 고통받는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아까 50년 이야기하신 선생님. 어떠신가요?"


  "그래도 10년 동안 조금씩 상처가 옅어져 간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우리의 역할은 상처받지 않는 아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지요. 선생님들의 역할은 그겁니다. 회복의 시간을 아이와 함께 해 주는 것. 그리고 우리 선생님들의 노력하에 그 기간이 단축될 수 있도록 함께 걷는 것이랍니다."


  나에게도, 회복의 시간을 함께 해 준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나보다도 더 화를 내며 분개하고, 때로는 이성적으로 나를 감정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같이 울어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지나간 내 시간 속에 함께 해 주었기에, 나는 비로소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나 스스로 깨달은 교훈을 바탕으로, 오늘도 힘내야겠다. 아이들이 너무나 오랜 시간 아파하지 않도록. 시간의 따스함으로 마음의 상처를 덮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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