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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냥 Mar 04. 2024

5학년 소년이 관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2)

두 소년의 수줍은 우정을 위하여.

  격려집단상담프로그램. 일명 [다독다독]은 사실 저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이다. 그렇기에 5학년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목표와 틀을 유지하되, 조금 더 학생 참여적이고 열린 생각이 가능한 수업의 구성이 필요했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제가 이번에 5학년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요."


  역시 혼자 보다는 둘이 낫다. 학교에서 상담교사는 나 혼자이지만, 든든하게도 내 곁에는 조언과 자문을 아끼지 않는 경험 많은 상담 교사들이 있다. 중학교에서 상담교사로 근무 중인 선배는 기존의 내 지도안을 보시면서 '이 부분은 이렇게, 이 부분은 이렇게' 매의 눈으로 꼼꼼하게 조언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목적을 가지고 수업을 하는 건 맞지만 말이야. 그 학생에게 너무 초점을 맞추면 안 돼.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에 대한 조바심이 생기고, 조바심을 아이들이 눈치채는 순간 수업 자체에 반감이 생기거든."


  아. 그 말을 듣고 뼈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D군과 상담을 마치고 바로 집단상담을 계획한 것도, 담임선생님께 부탁을 드린 것도. 나 스스로 정한 목적은 'D군과 반 아이들을 화해시켜야지.'였다. 즉, '모두 사이좋게 지냅시다. 화해 프로젝트!'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리 쉬운 일이던가. 나는 그저 가능성을 열어주는 역할일 뿐이다. 결국 이 수업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격려하는 말과 행동을 알고 이를 직접 실천에 옮기는 것.' 이 정도이다.


  "중심을 잃지 마. 우리는 해결사가 아니잖아. 그러다 네가 먼저 소진된다."


  '우리는 해결사가 아니잖아.' 이 말은 지금까지도 나의 자존감과 전문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느낄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말이다.






  아이들이 어색하게 랜덤으로 받은 카드를 읽는다. 평소 자주 쓰지 않는 말에 낯간지러운 듯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포기하지 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너밖에 없어."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격려 카드에 아이들이 익숙해지면, 다양한 사례 예시를 보여주고, 아이들이 이 상황에서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카드의 말을 친구에게 건넬 수 있는지 판단한다. 사례는 5학년 학생들의 공감대에 맞게 수정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생각 이상으로 잘 따라와 주었다. 딩동댕동. 1교시가 끝났다는 종이 울리고, 나 역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제일 큰 난관은 이제, 이어지는 2교시다.


  "이번 시간에는 2개의 격려 책갈피를 만들어 볼 거예요. 격려의 말은 내가 받았던 카드에 쓰여 있던 말도 좋고, 다른 친구가 받은 카드에서 마음에 들었던 말을 적어도 좋아요. 자, 여기부터 중요!! 책갈피 하나는 나를 격려하는 책갈피로, 나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만드는 거예요. 격려받고 싶었던 상황을 떠올리거나, 힘든 순간에 듣고 싶은 말을 생각해 주세요. 또 다른 책갈피 하나는, 친구를 위한 겁니다. 아직은 어떤 친구에게 책갈피를 줄지 정하지 말고 마음을 담아 만들어 주세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본래 저학년용 수업에서는 친구에게 주는 책갈피 딱 하나만을 만들었다. 저학년 학생들 중에는 아직 한글이 서툴고, 교사의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재료를 바꿔 달라거나 심하면 울기도 하기 때문에, 예상시간보다 더 여유롭게 활동 시간을 잡는다.


  하지만 역시 5학년! 곧 최고참 언니 오빠들의 위엄은 어디 가지 않는다. 착착착. 원하는 재료를 줄을 서서 골라가더니 이내 '격려 책갈피' 만들기에 몰두한다.


  "선생님! 저 좋아하는 가수가 했던 격려 문구로 만들어도 되나요?"

  "음? 어떤 가수인데?"

  "방탄소년단이요."

  "방탄? 일단 들어보고."


  오호. 방탄소년단이 이렇게 청소년들에게 힘을 주는 좋은 말들을 많이 했구나. 나도 공부가 되었다. 다음에 고학년을 대상으로 또 이 수업을 한다면, 아이들이 더 흥미를 느낄 수 있게 아이돌이나 배우, 혹은 유행하는 노래가사에서 격려문구를 찾아 예시를 들어도 좋을 것 같다. 가끔은 이렇게 아이들에게서도 배우는 점이 많다.


  일부러 남학생들도 좋아할 만한 스티커들도 들고 갔더니 A군도 D군도 꽤나 열심히다. D군은 격려의 말 옆에 귀여운 강아지도 그려 넣는다.


  "이렇게 하면 우리 집 강아지가 꼭 힘내라고 하는 것 같죠?"


  크흐. 역시!! 남학생들은 귀엽다는 말에 굉장히 자존심 상해하기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혼자 평정심을 유지하며 이야기한다.


  "그러네. 정말 귀엽다. (네가) 강아지가. 강아지 이름은 뭐니?"


  이렇게 모든 아이들이 책갈피 두 개를 만들고, 이 중에서 본인이 어떤 상황에서 격려받고 싶었는지 이야기해 보고 싶은 친구는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사실, 학생들이 발표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답이 딱 떨어지지 않는, 본인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른에게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때. 역시 훈련받은 아이는 다른 걸까. 또래상담자 아연이가 당당히 손을 든다. 아연이, 브라보!


  "저는, 예전에 물이 무서워서 수영장에 들어가지 못한 적이 있었어요. 유치원 때였을 거예요.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수영장에서 재미있게 놀고 헤엄치는 거 보면서 많이 부럽고 속상했어요."

  "그랬구나. 그럼 아연이는 그때의 너에게 어떤 격려의 말을 하고 싶니?"

  "이거예요. [포기하지 마.] 그리고 저 지금은 정말 포기하지 않아서 수영할 수 있게 되었어요."


  역시 내 애제자. 또래상담자 학생 중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보이는 아연이다. 아연이가 용기를 내 준 덕분에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하나. 둘 손을 든다. 그때, 슬며시 D와 A가 동시에 손을 들었다.


  엇! 둘 다 발표를 안 하는 일은 있어도, 둘이 손을 드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특히 평소 관심받기 좋아하는 D는 그렇다 치고 A는 의외다. 그럼 누구에게 먼저 발언권을 줘야 하나...


  "그래, A야. 이야기해 볼까?"

  "저는... 저는 엊그저께 2반 애들이 저희 반이 축구 제일 못한다고, 쪼랩이라고 했을 때 격려받고 싶었어요."


  윽, 직구다. 이거 괜찮으려나. 조심스럽게 D의 표정을 살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랬구나... A에게는 그 말이 참 속상했나 보네."

  "네. 저는 축구선수가 꿈이에요. 손흥민 선수처럼 월드클래스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매 경기 열심히 하고 싶어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혼자 하는 운동보다 다 같이 하는 운동이 좋아요. 그런데..."


  A가 감정이 벅차오른 듯 울컥하자, 나는 급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래. 꿈이 축구선수... 그래서 그때의 너에게 어떤 격려의 말을 해주고 싶니?"

  "[우리 같이 힘내보자.] 이거입니다."


  그다음. D의 발표가 이어졌다. 다른 아이들도 조마조마하게 D의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저는 1학기 때 패스를 잘못해서 '잘하지도 못하는 게 왜 나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운동은 잘 못하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체육시간은 좋아합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고, 저도 속상했는데, 그런 말을 들어서..."


  아, D가 운다. 다른 아이들도 당황한다. D옆의 짝이 다시 의자에 앉은 D의 어깨를 두드리며 '야, 울지 마.'라고 속삭인다. 속상함과 분노를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풀면 안 된다. 그건 분명 잘못된 방법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상황을 풀어나갈 타이밍이 따라주지 않았고, 솔직하게 마음을 부딪힐 그 전의 사례도 없었다.


  여전히 숨죽여 우는 D 옆에 다가가 D가 만든 책갈피를 들었다.


  "D야. 선생님이 대신 읽어도 되겠니?"


  D가 고개를 끄덕인다.


  "여러분 우리 D가 그때 친구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고 하네요. [괜찮아. 질 수도 있지. 충분히 노력했어.]"


  오해와 갈등은 풀면 된다. 다소 낯간지럽더라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다.







  "선생님. 그 뒤 A랑 D는 좀 어때요?"

  "데면데면해요. 그래도 예전처럼 서로 미워 죽을 정도는 아니고요. 오히려 여학생들이 D를 은근히 챙겨주려고 하던데요? D도 체육시간에 일부러 방해하는 것도 안 하고요. 그런데 여전히 실수할까 봐 불안한 건 있나 봐요."

  "어머, 우는 남자애가 인기가 있는 건가. D가 귀엽긴 하죠. 그래도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저도 애들한테 들은 건데요. 진짜 선생님도 들으면 빵 터지실걸요."

  "뭔데요?"

  "2반 애들이 A한테 또 '쪼랩'이라고 놀렸는데, 글쎄 D가 소리 지르면서 '야!!! 미래의 월드클래스를 못 알아보고 눈깔 삐었냐?!'라고 했대요."


  듣자마자 빵 터졌다. 우와, 사나이의 우정. 멋지도다. 그래,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거야. 너희들의 속도로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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