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 오늘 회식이야. 집 들어가면 연락할게."
어느 때와 같이 내 남자친구는 다정하게 자신의 모든 스케줄을 미리미리 내게 말을 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술 많이 마시지 말고 기회를 엿보고 얼른 도망가라며 이야기했다. 그는 웃으며 알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 지금 회식 2차 끌려가고 있어요. 기회 보고 도망 가보도록 할게요.'
그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나는 그의 연락을 보고 배시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귀엽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안심을 하며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화들짝 놀라며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고 휴대폰을 보았는데 남자친구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벽 세시인데. 나는 점점 걱정이 되었다. 술을 얼마나 진탕 마셨길래 연락도 주지 않은 걸까. 나는 그에게 짜증남과 실망감이 들었다. 그러다 점점 화가 났다. 여자친구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하얘졌다. 온갖 생각이 나의머릿속을헤집었고, 나의 속은 뒤집어졌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고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되었다. 심지가 다 타버린 양초처럼 나의 속은 괴롭다 못해 미칠 노릇이었다. 그에게 여러 번 전화를 남겼으나 받지 않았고 이내 나는 포기했다. 그러다가도 별일 없었을 거라며 스스로를 진정시키곤 했다. 낮 열두시가 되자 그에게 전화가 왔다.
"하늘아 정말 미안해. 정말 내가 할 말이 없어. 계속 집에 가려고 했는데, 붙잡혀서 끝까지 쫓아갔어. 다들 계신데 나만 혼자 나올 수 없는 분위기였어, 정말이야. 그래도 어떻게든 정신줄 놓지 않고 집에 가서 기절했어. 미안해. 다음부턴 꼭 연락 남길게."
그의 어쩔 줄 모르는 말투와 진심 어린사과에 나는 오랜 시간 기다리며 화를 삭인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사르르 녹았다. 하지만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알았어. 다음부턴 꼭 연락해."
처음으로 남자친구에게 화를 낸 나의 모습에 낯섦을 느꼈다. 나도 화를 낼 줄 아는구나싶었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왜 못 나와? 어디 아파?"
몇 주 후 채린이는 교회를 빠지기 시작했다. 몸이 좋지 않다, 집안에 일이 있다 등 점점 예배를 빠지는 날이 잦아졌다. 나는 채린이가 걱정이 되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전처럼 남자친구와 단 둘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내가 화를 낸 이후로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나는 평소 부리지 않는 애교도 부려보고, 그에게 투정도 해보았으나 그는 그저 멋쩍은 웃음만을 보였다. 나는 그와멀어질까 봐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괜히 그때 내 감정을 드러내서 남자친구 속을 상하게 했구나, 나는 자책했다.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착하고 좋은 남자친구에게 별 것도 아닌 일에 욱해서는 화를 내다니. 그의 멋쩍은 웃음을 볼 때마다 나의 가슴이 철렁했다.
채린이를 못 본 지 한두 달이 되었을 때였다. 연락이 뜸했던 채린이가 먼저 보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 달음에 채린이를 보러 나갔다. 그러나 카페에 먼저 와 앉아있던 채린이는 전과 다르게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채린이는 나를 보더니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채린이를 바라보았다. 갸우뚱하는 나를 보며 채린이의 눈시울과 코는 점점 더 붉어졌고,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나와 울고 있는 채린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갔다. 나는 채린이의 어깨를 내 손으로 감쌌다.
"무슨 일이야, 채린아. 울지 말고 말해봐. 왜 그러는 거야."
채린이는 한참을 말없이 울다가 고개를 들었을 땐, 화장이 눈물자국으로 인해 지워져 얼룩덜룩 더러워져있었다. 나는 채린이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티슈를 들었다.
"나, 지훈 오빠랑 잤어."
나는 순간적으로 티슈를 든 손을 멈추었다. 그렇게 나는 얼어버렸다. 머리가 새하얘지고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나의 둔한 움직임과 다르게 머릿속은 엄청나게 많은 생각들이 충돌하며 스쳐갔다.
"뭐라고?"
"나... 지훈오빠랑 잤어. 회식 날 둘 다 너무 취해서 도저히 집에 가기 힘들었는데, 그 주변에서 숙소를 잡고 정신차리면 바로 집에 가려고했는데... 너무 취해서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어.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해..."
채린이의 울먹거림으로 인해 웅얼거렸으나 채린이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어째서..."
나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장난치는거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거짓말이길 바랐다. 이 기분이 무슨 기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가장 친했던 친구와 사랑하는 남자친구의 배신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채린이를 쳐다보았다. 울고 있는 채린이는 너무 화가 나게도, 그 순간조차도 예뻐 보였다. 저렇게 예쁘고 인기가 많으니깐 내 남자친구가 나를 버리고 갔구나. 나는 내 모습이 불썽 사나워보였고 초라해졌다. 채린이와 남자친구에 대한 분노보다 나 자신의 초라함이 더 컸다. 나를 붙잡으며 미안하다고 잡는 채린이를 뿌리치고 황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집에 돌아와 나는 내 몸에 있는 모든 수분을 다 쥐어짜 엉엉 울었다. 나에게 이렇게 눈물이 많았구나, 이제 나는 누구 하나 믿을 수가 없구나. 나는 한 순간에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잃었다. 나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된 것이다. 한순간에 나의 가장 큰 행복은 절망으로 전락해 버렸고, 절망은 이내 알 수 없는 분노로 변해버렸다. 단순히 나를 배신한 두 명에 대한 분노를 넘어 작은 행복조차 쥘 수 없게 하는 모든 것에 화가 났다. 내 소중했던 친구 채린이도, 사랑했던는 남자 친구도, 나와 엄마를 떠난 아빠도 나를 버렸다. 나를 붙잡아 줄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