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생과 나는 다른 남매들보다 꽤 돈독한 편이다.
물론 싸울 때도 있었다.
엄마의 여러 차례 유산 끝에 다섯 살이나 늦게 태어난 동생을 부모님이 유독 예뻐하는 것 같아 질투했고,
늘 나보다 어린 동생을 감싸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냥 한 대 쥐어박아도 될 걸,
신발장에 웅크린 초등학교 저학년 동생을
굳이 신발 신은 채 발로 밟은 적도 있었다.
아마 미운 기억은 이 정도였을 것이다.
유치원생인 남동생의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손가락 이야기라고 이야기를 지어주면
10살도 안된 남동생은 까르르 웃으며
"또 해줘!"의 반복이었다.
그 모습이 귀엽고 뿌듯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었고,
같은 반 일진 남자애가 초1 남동생을 괴롭힌 걸 듣고
내 작은 남동생이 무서워했을 것에 분노하여
"너 내 동생 괴롭히지 마!"라고 화내서
그 친구에게 사과까지 받아낸 적도 있다.
동생과 떠드는 걸 좋아하여 대학생이 되어서도
내 방 침대를 두고 동생 침대 밑에서 잘 정도였고,
돈을 벌게 된 뒤에는 맛있는 식당 등을 데리고 다니며 동생을 챙겼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남매라기보다 자매 같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스무 살이 된 동생과 처음 술자리를 갖던 날은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특별한 순간이었다.
고깃집, 이자카야, 사케 무한리필 술집, 칵테일 바…
우리는 다섯 살 차이가 무색하게 단짝처럼 어울렸다.
엄마가 돌아가셨기에 엄마의 기억을 나누기도 했지만
그뿐 아니라 그 이상의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술자리는 단순한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었다.
화장실에 달려가 토하고 돌아와도 술자리가 끝날까 아쉬워 토하지 않은 척하고 다시 잔을 부딪히던 사이.
“야, 너도 그때 토했냐?”, “어? 너도?” 하며
썰을 풀던 순간마저 또 다른 술자리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술 코드도, 대화 코드도, 여행 코드도 잘 맞았다.
남매끼리 국내외 여행을 다닌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지만 우리에겐 늘 있는 남매여행이었다.
몇 년 전, 동생이 다른 지역으로 취직을 하고 이사하며 자주 보긴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1년에 한두 번은 꼭 우리 둘만의 술자리를 챙겼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고, 동생은 불규칙한 근무를 하면서도 말이다.
그런 동생이 내년에 결혼을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남동생은 결혼하면 달라진다.
누나와의 우애도 사라지고,
자기 가정 챙기느라 바빠진다.”
그리고 꼭 덧붙인다.
“너처럼 애정 많은 누나가 시누이짓 하기 쉽지.”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말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걸.
내가 사람들 말처럼 애정이 많은 누나라면,
동생이 잘 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더욱 단호하다.
나는 동생의 삶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잔소리하는 시누이가 될 생각도, 그럴 여지도 없다.
우리는 오랜 시간 충분히 친했고,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 사실만으로 나는 고맙고 만족스럽다.
내 동생은 언제나 내 친구였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늘 알려주던 공부 잘하는 친구,
귀찮은 걸 툭 던져놓으면 툴툴대면서도 해주는 친구,
내가 돈을 쓰면 그만큼의 노력을 보여주던 염치 있는 친구,
일하다 짜증 나서 카톡을 하면 늘 같은 분노를 보여주는 친구.
그리고,
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함께 의지하던 친구.
친척들의 모진 말에 내가 복도로 뛰쳐나와 오열할 때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며 뚝 그치고 너도 할 말 있으면 다하라고 힘을 주던 친구.
힘든 시간을 보낼 때면 친구들과 놀다가도 달려와주던 든든한 내 편이었다.
이제는 그 든든함으로 자신의 가정을 이끌어갈 것이다.
나는 그 듬직함을 존중하고,
동생이 스스로 버텨왔고 버텨낼 모든 시간을 응원한다.
내 동생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다.
함께한 시간과 추억이 누구보다 충분하기에 아쉬움은 없다.
돌아가신 엄마에겐 어려 번의 유산 끝에
포기하지 않고 이런 동생을 가족으로 만들어 주어 고맙고,
우리가 이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와의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아빠에게도 고맙다.
더불어
내 동생을 선택해 준 예쁜 여자친구에게도 고맙다.
두 사람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 전인
결혼 전에 누나로서 꼭 한마디만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