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외식 후 집에 와 아이랑 목욕을 하고 있었다.
김으로 가득한 욕실 안에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아이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내가 태어나기 전엔 아빠가 엄마를 '애기야~' 하고 사랑해 줬잖아.
근데 이제 아빠는 나한테만 '애기야~'하고 나를 더 좋아하니까,
엄마는 내가 이제 더 사랑해 줄게.”
순간 무슨 말이지? 싶어 의아하던 나는 곧장 그 귀여운 발상에 웃음이 터져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도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엄마는 내가 이제 더 사랑해 줄게.' 그 말은 지금까지도 나를 꼭 안아주는 것 같다.
나는 여섯 살 많은 남편과 20대 중반에 이른 결혼을 했다.
그 시절의 남편은 애칭 겸 호칭으로 나를 향해 ‘애기야’라고 불렀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대입해 생각하면 꽤 오글거리지만 그땐 그 말이 좋았다.
“애기야”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정말로 애기가 된 것처럼 마음이 순해져 착해졌다.
그리고 사랑받는 기분이 당연스레 느껴졌다.
그래서(?) 임신 전부터 나는 아들을 낳고 싶었다.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나 혼자 여자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꾸준히 이 가정 안에서 사랑받고, 보호받는 존재로 남고 싶었다.
그래서 내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걸 알았던 그날, 마음이 꽤 섭섭했다.
여자의 촉이란 이런 걸까? 남편이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없던 지난날과는 다르게, '딸바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렇게 남편의 나를 향한 사랑이 딸을 향할 것이란 걸 직감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엄마는 내가 사랑해 줄게’라고 말하는 딸을 낳고 키우며 나는 진짜 ‘엄마’가 되었다.
남편을 빼다 박은 아이와 남편, 둘이 나란히 앉아 나를 보며 '깔깔깔' 웃을 때면,
그 닮은 웃음이 웃기고 행복해 나도 함께 '깔깔' 웃으며 '완전한 가족'이 됨을 느낀다.
남편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딸바보’가 되었다.
나에게서 아이에게로 옮겨진 사랑이 보이지만 그 모습이 자연스럽고 예쁘다.
그리고 남편이 딸바보가 된 덕에 나보다 적극적인 육아를 이어가는 덕분에 나는 육아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
바보가 된 남편일지라도 아이가 너무 말을 안 들을 때면 화를 꾹꾹 누르며
“너 아들이었으면 진짜…” 하고 중얼거릴 때도 있지만,
‘아들이었으면 아빠한테 크게 혼났을 거야’ 하는 생략된 말이 너무 웃겨 웃으며
그럴 때마다 나는 “딸이라 정말 다행이지?” 하고 웃는다.
아이는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다.
아이 스스로 받는 사랑이 얼마나 크게 느껴졌으면 정말 뜬금없이,
사랑을 ‘빼앗긴’ 나를 향해 자기가 대신 사랑해 주겠다는 말을 해줄까.
아이는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사랑을 더 크게 만들어주는 존재.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사랑을 더 넓혀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순수한 존재.
“엄마는 내가 이제 더 사랑해 줄게.”라고 아이가 했던 말 하나로
나는 이미 '빼앗긴' 남편의 사랑 전부를 다 돌려받았다(ㅋㅋㅋ)
그 한마디에 가족을 향한 내 사랑도 더 커짐을 느낀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나는 오늘도 [그 와중에 엄마]인 시선으로 이런 순간들을 기록할 수 있다,
이 에세이가 조금씩 채워져 가는 지금, 그게 나의 또 다른 행복한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