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선택란에 고를만한 것이 없을 때 드는 생각
금융기관 앱에서 나의 정보를 업데이트할 때 종종 마주치는 문항이다.
'현재 직업을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민될 때가 있다. 현재 직업란을 고를 때다. 예전에는 현재 직업을 당당히 선택할 수 있었다. 더구나 분류표 맨 위에서 해당 항목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기업 회사원'
지금은 한참 고민하게 된다. 이제 직장을 퇴사해서 연말정산을 안 한다. 따로 창업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임대소득이 있어 종합소득세를 내고 있으니 경제활동에 당당히 참여하고 있기는 하다.
'그럼 자영업자로 선택해야 하나?
자영업자라 분류하기엔 따로 점포가 없으니 형체가 좀 불분명하다. 그렇다고 전문직도 아니다. 분명히 놀고 있지는 않는데.. 부동산 임대 사업자란 사업자 등록증도 당당히 갖고 있다. 그럼 '사업가'인가? 물론 나는 '사업가'라고 생각하고 늘 나를 그렇게 대하려 한다. 그런데 분류 항목에 '사업가'란 선택지는 대부분 없다.
'프리랜서?'
프리랜서란 표현이 뭔가 '자유인' 느낌을 주는데 실상은 치열한 프로들의 세계일 것이다. 아니면 블로그를 쓰고 있으니 '크리에이터'? 아직은 '창조성'과 거리가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쑥스러워도 '작가'란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든다. 하지만 금융기관에서 요구하는 분류표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기타' 또는 '무직'
내가 제일 선택하고 싶지 않은 항목이다. 어떤 은행은 기어코 저 선택을 하게끔 매우 고압적이고 단순한 분류표를 제시하곤 한다. 대기업 재직자 이거나 공무원, 전문직(의사, 변호사 등)등을 최고의 선택지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이 이들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굴러가나.. 직업의 세계는 매우 다양해졌는데 금융기관은 여전히 고객 마인드(?)가 부족하다.
사실 이런 서운함 또는 왠지 작아지는 느낌은 자연스러운 변화 과정의 일부다. 크고 안정된 시스템의 부속품에서 소박해도 나만의 시스템으로 홀로서기 위한 과정이다. 이제 뭐 이런 직업 분류란 자체가 의미가 있는가? 어디 남 보라고 제출할 일도 별로 없는데. 직업란 제출..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억난다. 그때는 '부모님 직업란'을 써서 제출했었다. 지금은 금융기관 앱 정보를 업데이트할 때나 대출을 갱신할 때 직업란을 적게 된다.
그때마다 약간의 버퍼링과 선택장애가 생기곤 하는데 그 순간 나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
급여를 받고 하는 일만을 '일'이라고 할까? 그건 아니지 않나..
누구나 할 일이 많다. 그 일의 대가가 꼭 급여 형태로 지급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을 위한 봉사 활동이 급여가 없다고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오랜만에 귀국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은 급여가 따르지 않는다. 부모나 자식 간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 참 중요한 일이다. 아내가 시키는 심부름?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다. 앞으로의 급여는 신뢰와 행복을 느끼는 순간 이런 거 아닐까.
얼마 전 '텐트 밖은 유럽'이란 여행 방송을 재미있게 봤다. 해외의 멋진 곳들이 소개되어 흥미롭다. 그런데 출연진의 하루 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저녁에 숙박할 캠핑장을 잘 찾아가는 일과 먹거리를 미리 준비하고 제때 해결하는 일이다. 관광지 구경이나 즐거운 감상은 사실 잠깐이다. 세상 보기 드문 멋진 명소를 찾아가도 반드시 해결할 일상의 일이 따른다.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이걸로 채울 수밖에 없다.
'감출 수 없는 일상의 소중함..'
맞다. 50대가 넘어가면 표준 직업란은 중요하지 않다. 마땅히 고를 게 없으면 비슷한 걸 고르고 의연하게 넘어가면 되는데 뭘.. 한걸음 한걸음 내가 탐색하고 싶은 세상으로, 일상을 넘어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근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게 문제다.
꼭 보람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뭔가 의미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옛날같이 약속된 돈(급여)도 나오지도 않는데..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든 누가 뭐라 하겠는가. 스스로 만든 나침반이 없어 못 갈 뿐이다.
시간이란 자산을 일상의 일을 넘어 '알고 싶은 것'에 투자하고 싶다. 지금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곳이고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찾는 '행복과 자유'란 어떤 색깔일까? 울긋불긋한 색감의 한계는 무한한다.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 계속 어디론가 찾아가고 탐색하고 싶다. 그게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일이다.
'부동산 투자로 행복할 수 있을까?'
직장생활 초반 어느 날부터 '부동산과 인생의 알고리즘'이 궁금했다. '알고리즘'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나 방법 또는 명령어들의 집합이다. 어쩌다 인생의 궁금증을 부동산이란 매개체를 통해 이해하고 그 숙제를 풀어보려 했다. 다양한 명령어들을 입력하고 결과를 확인하다 보니 궁금증만 더 커진다.
'부동산 자산을 축적하면 자유로와 질까?'
아직 결론은 못 냈다. 여전히 진행형이다. 부동산이란 주제는 흥미롭지만 '변화무쌍' 만만치 않고, 인생 고민도 까도 까도 변형돼서 계속 나온다. 그래도 풀어가면 될 거 같긴 한데.. 인생 숙제의 '킬러 문항'만 피해 가면 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흠, 킬러 문항은 인정하고 그냥 패스다. 이럴 시간이 없다. 대신 다른 문항은 계속 도전하고 풀어볼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정말 직업란에 쓰고 싶은 직업은 이것이다.
'투자자'
돈보다 시간을 잘 투자하는 '행복한 투자자'가 되고 싶다. 아무도 방향과 지름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답답해서 인생 경험 많은 K선배에게 물었다.
"어떡하면 행복한 투자자가 될 수 있을까요?"
"네가 세상의 원리를 어디까지 아냐?"
"그렇게 멀리까지 한참 가봐야 할까요?"
"그러려면 이성보다는 정서적인 감정이 더 중요해. 이해되니?"
"... "
아직 멀었다. 계속 가야 한다. 낯선 감정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