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한 초안 계속 써 가기
대기업에서 약 30년을 근무하고 퇴직했다. 30년을 시간으로 계산하면 몇 시간인가. 1년이 8,760시간이다. 30년이면 262,800 시간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아웃 라이어'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으로 '1만 시간의 법칙'을 언급했다.
직장 생활 기간 26만 시간 중 근무시간만 따로 계산해도 약 6만 시간이다. 최소 6개 분야에서 각기 다른 전문가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시간이다. 매일 흘려보내는 하루하루 시간은 짧아 보이지만 쌓이고 모인 시간의 가치는 놀라운 수준이다.
일생은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0대 후반부터 50대 중반까지는 노동시간이 가장 많은 시기이다. 평균적으로 직장인은 청년부터 중년까지 약 6만 시간에 해당하는 근무시간을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단순한 시간량 투입만으로는 곤란하다. 자리에 요구되는 직무지식과 소통능력 그리고 일정 수준의 사내정치 스킬까지 보완하며 자기 몸값을 계속 높여가야 한다. 매우 힘든 과정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시기다.
직장생활은 직급과 직책을 높일 때마다 수입이 계단식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올라간다. 중간중간 여러 희비를 겪으며 불확실성을 헤쳐나가고 가장 분투하는 시기다. 그래도 직장생활은 다른 인생 경로대비 Input 대비 Output의 인과관계가 비교적 명확한 프로세스다. 그래서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나오는 기간이다. 그런데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인생 후반기 자유로운 인생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1년 국세청 발표 기준 근로자 평균 연봉은 4,024만 원이다. 이 연봉은 어느 정도의 자산가치와 비슷할까? 연봉을 현금흐름으로 보고 이를 투자수익률로 나누면 자산가치로 환산해 볼 수 있다. 투자수익률을 3%(21년 시중금리)로 가정 시 자산가치는 13억 4천만 원이다.
평균적인 근로자는 13억 수준의 자산가치를 운영하고 있는 나름 오너인 셈이다. 다만 이 자산가치는 직장생활을 하며 급여를 받을 때만 유지된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래서 이 시기는 자기 몸값을 올리는 노력과 활동이 최우선 순위로 중요하다. 소위 '영끌'이 진정 필요한 시기다.
다만 직장생활이 끝나는 퇴사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21년 통계청 발표 기준 중장년층(40~64세)의 주택소유비율은 43.8%다. 중장년의 50% 이상이 아직도 기본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집이 없다. 21년 국세청 기준 전국 순자산 5 분위가구(상위 20%)가 평균 14억 8천만 원을 보유하고 있고, 이중 실물자산 비중이 82%다. 즉 부동산 순자산을 12억 수준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직장생활 이후에 최소한 어느 정도 자산을 보유해야 상위 20%에 속할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미리 시간을 투자하면 부동산으로 자산을 키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신혼시절 살았던 분당 이매동 17평 소형 아파트가 있다. 당시 97년 가격이 7천만 원대였다. 그런데 이것이 21년 최고가 9억 2천5백만 원까지 찍었다. 그동안 아파트 디자인이 바뀐 것도 아니다. 새로운 설비가 추가되지도 않았다. 그 부동산은 그 위치에 24년간 그대로 있기만 했다. 24년이란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된 것인가? 좋은 입지의 부동산은 시간을 먹으며 스스로 성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의 가치는 장기적으로 계속 떨어지기 때문이다.
'레버리지'의 작가 롭 무어는 '부동산과 지식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이익을 창출한다'라고 말한다. 사람의 업무 행위가 종료되어도 투자된 시간만큼 스스로 돈을 벌어들이는 시스템인 것이다. 좋은 투자의 기준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꾸준한 생산자 역할을 하고 있는지 여부다. 부동산은 필수재이자 투자재이다. 그리고 경제가치와 공간가치를 만드는 생산시설이다.
'공간의 가치' 저자 박성식 박사는 "공간은 시간을 포함하고, 시간의 누적효과로 우리의 도시를 만들고 있다."라고 말한다. 부동산은 공간의 가치다. 우리 삶은 누구나 부동산, 어떤 공간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늘 호흡하는 공기와 같고 늘 사용하는 시간과도 같은 소중한 가치다.
그런데 부동산이란 공간은 다른 재화대비 어렵다. 우리는 옷을 하나 사더라도 여러 옷을 입어보고 결정한다. 옷마다 디자인이나 재질도 다르니 꼼꼼히 만져보고 비교한다. 브랜드와 가격까지 여러 번 생각하게 된다. 또한 어디서 구입할 지도 알아보고 많은 정보를 미리 검색하는데 이런 과정 자체도 즐거움이 된다.
반면 부동산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사야 할지 막막하고 아무도 친절히 알려주지 않는다. 옷보다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지만 옷만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기대 수준이나 욕망은 높아서 남의 말에 귀가 약해진다. 부동산이란 공간은 한번 소비하고 잊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삶의 자산이다. 부동산은 매일매일 소비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미래를 만들고 가치를 생산하는 곳이다.
예를 들어 공간의 소비란 무엇일까. 자연을 바라보는 멋진 레트로풍의 힙한 카페공간을 생각해 보자. 이런 공간에서는 같은 맛의 커피도 다르게 느껴진다. 함께 있던 사람과의 좋은 추억도 그 공간만의 기억과 함께 인생 그림의 한컷이 된다. 그 공간은 행복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주는 소비공간이면서 추억을 만드는 생산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매듭들은 늘 공간과 함께 이동한다.
부동산은 도시가 진화하고 발전하며 '돈의 재분배'가 쉼 없이 이루어지는 치열한 경제 생태계다. 그래서 부동산가치와 변화 요인들을 탐구하는 것은 매우 실리적인 고민이다. 실리적이지만 즐거운 고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은가.
이 고민에 빠지다 보니 공간이 바뀌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인생 관심사가 되었다. 가끔씩 일상에 지칠 때 아무것도 올라서지 않은 공사장 벌판을 찾아가 볼 때도 있다. 이 빈 공간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때가 있으니 아내도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자유로운 인생이라는 초안을 그렸다. 그리고 아파트뿐만 아니라 경험 삼아 다양한 분야의 부동산 투자에 도전했다. 그리고 단맛 쓴맛 매번 그 결과를 복기하고 나만의 루틴을 반복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그 초안을 수정하며 진행 중이다. 그러면 그 '초안'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있긴 한 걸까?
픽사의 애드 캣멀이 말했다.
'성공은 초안과는 전혀 다른 버전으로 탄생하지만, 초안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