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넘도록 살던 곳인데, 화포 소리 좀 들린다고 쉬 물러날 리가 있나.“
작은 방이기는 하나 양반들이나 출입하는 기생집에 들어와, 퇴기라고는 해도 아름다운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는 게 꿈만 같아, 덕수는 마음에 누르고 눌러두었던 말을 꺼냈다.
“하늘 같은 임금께서 살던 곳이면 뭐 하오? 이젠 하늘보다 무서운 범의 소굴일 뿐인데. 그놈들이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아시오? 화포를 쏘아대 봐야 잠깐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다오. 조총을 쏘아봤자 한 놈 맞출까 말까지. 이놈들이 낮에는 숨었다가 밤이 되면 사람을 덮쳐 목숨줄을 끊어버립디다.”
덕수는 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듯 눈을 감았다 뜨고 술잔을 비웠다. 호산월은 그에게 술을 따라주며 지나가는 말인 듯 물었다.
“그런 소리를 들은 적도 있습니까?”
“내가 듣는 소리라고는 호랑이 울음소리와 화포 쏘는 소리뿐이오.“
“아니요. 들릴 수 없는 소리 말입니다. 절대 들리면 안 되는 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저저번에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어째서 나를 찾아와 이리도 서글피 불러대나? … 그런 소리요.”
덕수는 거친 손을 쥐었다폈다하다가 술잔을 연달아 비웠다. 큰 상에는 임금님이나 먹을 수 있는 때깔 좋은 음식이 잔뜩이었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화로 속에서 붉은빛을 내며 숯이 타오르고, 창으로는 달빛보다 밝은 기생집 등불이 흔들렸는 데도, 덕수는 추위에 얼어붙을 듯 웅크렸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말해주리다. 눈이 참 많이도 내린 날이었소. 경복궁에 눈이 잔뜩 내리면 참으로 절경이요. 불타버린 기둥도 쓰러진 처마도 하얗게 덮이고 잡초며 나무며 다 똑같지요. 그런 날이었소. 나랑 짝으로 다니던 조총수 하나가 오줌을 누러 갔다가 범에게 다리를 물렸다오.”
덕수의 눈이 공허해지더니 하얀 눈이라도 쌓인 듯 차가워졌다.
“집채 같은 호랑이가 하얀 눈 속에서 그 친구의 다리를 씹어먹었소.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나도 들었는데, 그 친구가 못 들었겠소? 자기 무릎뼈가 깨지는 것을 그 친구는 제 눈으로 직접 보다가 까무러쳤지요. 그 친구의 피가 이곳저곳으로 튀고 흘렀소. 호랑이의 아가리는 온통 핏빛이었고, 하얀 눈 위로 붉은 피가 흐르고 고이고, 뜨뜻한 그 피에 눈이 녹더이다.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소. 그놈이 먹이를 물고 있는 동안 도망치지 않으면 나도 죽겠구나. 숨어있던 표범과 호랑이가 튀어나올까 무서워 정신없이 달리고 달렸다오.”
화포장 덕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호산월은 직접 젓가락을 들어 육전 하나를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덕수가 육전을 받아먹고 술잔을 비운 후에야 떨던 것을 멈췄다.
“그 시신은 찾았습니까?”
호산월의 질문에 덕수는 고개를 저었다. 호산월이 다시 그의 술잔에 맑은술을 따르면서 그보다 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경복궁에서 화포를 쏘는 진짜 이유를 아십니까?“
“호랑이를 쫓아내야 경복궁을 재건하고, 그래야 나라의 법통이 다시 서는 거라고 … 그래서 밤낮없이 화포를 쏘고 조총을 쏘는 거 아니겠소.”
호산월은 웃으며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화포장께서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20여 년을 살던 범들이 제 집을 내줄리 없다면서요. 쫓아내기는커녕 새끼를 낳고 또 낳아, 이젠 소굴이 되었다. 이게 다 헛짓거리다.“
“그럼, 우리는 왜 밤낮으로 화포를 쏘아야 하지? 무엇을 위해?”
호산월이 쇠꼬챙이를 들어 화로 속의 숯을 뒤적였다.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자, 숯이 더 빨갛게 타오르고 열기가 퍼졌다. 술기운에 숯의 열기까지 더하자, 덕수는 머리에 쓴 갓을 뒤로 넘기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열 살 쯤이었나? 착호갑사였던 아버지는 전란에 의병으로 참전하고, 어머니와 둘이 왜놈들을 피해 산속에 숨어 살 때였지요. 어느 날 어머니와 둘이 밤을 구워 먹고 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호산월은 그날을 떠올리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은섬아 … 아부지가 왔다. 마누라 … 내가 왔어.”
“의병으로 간 아버지가 온 거요?”
“도성의 궁궐이 다 불에 타고, 왜놈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횡횡하였지요. 코 없는 시신을 보았다. 귀 없는 시신을 보았다. 그럴 때지요. 왜놈 손에 죽지 않으면, 굶어 죽거나, 그도 아니면 호랑이 밥이 된다고 할 때였어요.”
덕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나라 곳곳이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했지. 이 전쟁이 언제 끝나나. 언제쯤이면 집에 돌아가 그리운 어머니를 뵐 수 있을까, 그랬지요. 그래. 반가운 목소리는 아버지였소?”
“그런 줄 알고 뛰어나가려는데, 어머니께서 붙잡았지요. 너는 여기 있어라.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말고. 절대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덕수는 그 말에 푹 빠져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표정이 변하는 호산월을 바라보았다. 서른이 훌쩍 넘었다고 들은 퇴기인데도, 아름다운 자태가 눈 내린 나뭇가지에 핀 매화 같았다.
“그래서 어찌 되었소?”
“혼자가 되었지요. 아버지도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놈들에게 잡힌 거요? 혹시, 어린 딸을 두고 도망이라도 친 건가?”
오래 타서 길어진 초의 심지 때문에 촛불이 더 흔들렸다. 흔들리는 촛불 때문에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덩달아 흔들렸다. 호산월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길어진 심지의 끝을 잘라냈다. 촛불의 흔들림이 멈추자, 그림자도 멈췄다. 호산월은 자신의 뒤가 아닌 화포장 덕수의 등 뒤, 벽을 보았다. 촛불 때문에 생겼어야 하는 그림자는 없고, 그녀가 그린 호랑이 그림만 걸렸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돌아오지 않은 지 칠 일이 지나 문밖으로 소리가 들려왔어요. 처음엔 아버지가 불렀어요. 은섬아! 은섬아!”
“대답하였소?”
“아니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다음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은섬아! 은섬아! 에미가 왔다.”
“대답하였소?”
“아니요. 대답하지 않았지요. 대신 문풍지에 구멍을 뚫어 밖을 보았어요.”
“보았더니?”
덕수는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어 호산월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어둠 속에서 하얀 호랑이가 마당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지요. 그 호랑이에게 붙들린 어머니가 나를 부르더이다. 온몸은 피투성이요. 혼령은 이미 백호의 종이 되어 먹이를 낚는 미끼 노릇을 하며 말입니다.”
덕수가 입을 떡 벌리고 그 말을 다 들었다. 호산월은 술병을 들더니 빙글빙글 돌렸다. 술잔에 남은 술을 부었지만, 반도 채우지 못했다.
“술이 모자란듯하니 가서 더 가져오겠습니다.”
“아니요. 술은 이제 마실만큼 마신 듯하오. 너무 많이 마셨지. 내 주제에 이렇게 좋은 곳에서, 그대처럼 아름다운 기생을 앉히고 이 밤을 보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소이다. 그만 일어나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나는 화포장 덕수의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었다. 붉은빛의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르며 덕수가 움직이도록 했다. 호산월이 따라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별채의 마당은 눈이 쌓여 아직 녹지 않아 스산하고 어둑했다. 눈 쌓인 길로 되돌아가는 덕수를 호산월이 따라갔다.
“다 알면서 내게 술을 대접하였소?”
“어머니 생각이 나지 뭡니까?”
“그놈을, 도망간 조총수 아우를 나 대신 산군께 데려가려 했지요. 나를 호랑이에게 버려두고 도망간 것이 원망스러워 복수하려 했소. 호랑이에게 다리가 씹히는 고통을 그놈에게도 똑같이 겪게 하려 했는데, 그대를 만나 여기까지 들어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소.”
호산월은 기생집의 뒷문을 열어 그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경복궁에서는 여전히 화포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조총 쏘는 소리도 들렸다.
“경복궁에서 화포를 쏘는 이유가 호랑이 때문이 아니면 뭐요?”
호산월은 대답 대신 화포장 덕수를 바라보았다.
“나 때문이군. 나 같은 귀신이 무서워 쏘는 게야. 놀란 호랑이들이 민가로 나와 백성을 잡아먹든 말든 상관없겠지.”
호산월은 나올 때 손수건에 싸 온 떡을 내밀었다. 쑥과 콩이 들어간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떡이었다. 그 떡을 받아 든 화포장 덕수는 미소를 지었다.
“가는 길에 드세요. 날이 밝으면 아는 이들에게 부탁해서 화포장님의 뼈를 찾아 무덤을 만들어 드릴게요. 돌을 쌓아 튼튼한 무덤을 만들면 이렇게 추운 밤에 호랑이의 먹이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화포장 덕수는 호산월이 싸준 떡을 품에 꼭 안고 밤거리를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이의 종이 된 창귀에게 오늘밤이 너무 춥지만 않기를 바라며 호산월은 뒷문을 닫아걸었다. 하늘에 뜬 달을 보며 어느 산에서 창귀가 되어 해매이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 겨울밤이 너무 길지 않기를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