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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미리 Apr 18. 2023

리라꽃 향기를 돌려주세요

라일락, 수수꽃다리

   


  리라꽃이 유혹하는 계절이다. 시골길을 걷다가 담장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리라꽃을 마주했다. 반가운 나머지 저절로 꽃 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지고 향기가 맡아진다. 보랏빛 꽃은 아닌 척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우리 집에 가서 살자”라고 꽃에게 허락을 청한 후, 한 마디를 꺾어 집으로 모셔왔다.   

   

  리라꽃 즉 우리가 흔히 부르는 라일락은 수수꽃다리라는 순우리말 이름이 있다. 물론 꽃잎의 모양은 조금 다르다. 1947년 미 군정청에 근무하던 엘윈 M. 미더가 우리 토종식물인 털개회나무 씨앗을 받아 본국으로 가져갔다. 그 후 품종을 개량하여 이름을 “미스킴라일락”이라고 지었으며 우리나라가 역수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품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리라꽃의 꽃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젊은 날의 추억”이 가장 내 마음에 와닿는다. 베사메무쵸란 노래에서 처음 리라꽃이란 이름을 듣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라일락이란 이름보다 리라꽃이란 이름이 더 친근한 이유다. 라일락(lilac)은 영어 이름이고 리라(lilas)라는 프랑스 이름이다.    

 

  베사메 무쵸는 멕시코의 작곡가 콘수엘로 벨라스케스가 작곡한 곡이다. 스페인어로 Bésa(키스하다) me(나에게) mucho(많이)라는 뜻이다. 멕시코 노래들 중 전세계인이 유독 사랑해서 많이 리메이크 된 곡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49년에 현인이 ‘베사메무쵸(남국의처녀)’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다가 1960년에는 남국의 처녀는 빠지고 원곡의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다고 한다.       


  “베사메 베사메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노래도 못 부르면서 흥얼거렸던 것 같다. 젊은 날의 향기를 잊어버렸다면 리리꽃 향기를 맡아보라. 그러면 알 것이다. 이 봄, 리라꽃이 지기 전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젊은 날이 가기 전에, 젊음이란 붙잡을 수가 없다.      


  “베사메무초(Bésame Mucho)”라는 노래를 불렀던 이가 있었다.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렸지만. 노래방이 유행했던 젊은 날의 한때 그이는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이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젊은 날에 이승을 등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리라꽃이 피는 계절이면 젊의 날의 향기인 듯하여 더 애절하게 다가온다.   

  

  리라꽃을 꺾어 돌아오는 길, 구십이 넘은 할머니를 만나야 할 일이 있었다. 울타리가 처진 문밖에 빗장이 걸려 있었다. 빗장을 올리고 들어가니 할머니는 TV를 벗 삼아 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집, 홀로 위리안치 섬이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경계심도 없이 천진난만하게 웃으신다. 자녀분들은 언제 오는지 묻는데 오지 않는다고, 밥 해주러 아침과 저녁에 요양보호사가 다녀간다는 말뿐이다.     


  “절대로 늙지 마쇼잉, 절대로 절대로 늙지 마쇼잉” 할머니는 나를 보며 순간적으로 내뱉는다. 늙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덧붙이신다. 누구를 만나든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야기할 사람은 없고. 홀로 섬처럼 집에 갇혀 지내고 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어떻게 안 늙겠어요”라고 화답하니 “다 소용없다고”, “늙지 마쇼잉”만 되풀이하신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 리라꽃 향기가 담장을 넘는다.     


  할머니는 리라꽃 피는 이 계절에 “젊은 날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었으리라. 베사메부쵸 한 구절을 홀로 노래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리라꽃 향기를 돌려달라고 간절하게 소원을 빌기도 했으리라. 할머니는 내게 늙지 말라는 화두를 던져 주셨다.      


  늙는다는 것은 젊은 날의 기억도 차츰 사라지고 삶의 방식도 잊는다는 것이다. 섬이 된 어르신들은 치매를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할머니는 몸은 늙어도 마음이라도 젊게 살라는 것은 아닐까 되뇌어 보지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제도 겨우 오십을 살았다고 한다. 늙지 않고 영원히 삶을 누릴 수는 없다. 화무십일홍처럼 우리의 삶도 결국은 지고 만다. 사는 일에 대해 조금은 나를 내려놓고 가볍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폐허가 되어가는 자리마다 섬이 생겼다. 길을 걸으며 그 길에서 홀로 갇힌 어르신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분들도 길을 내기 위해 열심히 사셨을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길도 개척했으리라. 이제는 있는 길도 묻힌다는 것을 아는 서러운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다 소용없다고” 몸부림인 듯 외치는 것 같았다.     


  집으로 모셔온 리라꽃을 꽃병에 넣고 물을 가득 채운다. 머금은 꽃이 톡톡 꽃잎을 벙근다. 리라꽃 향기를 맡으며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다 소용없다고” 하셨던 할머니의 외로운 외침처럼 우리 모두는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오늘 우리 집에 데려온 너랑 살아야겠다. 봄밤이 깊어가는데 어디선가 “리라꽃 향기를 돌려달라”는 간절한 소리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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